“北 변화 신호음 늘어… 한반도 ‘기회’올 것”

존 마레스카(70) 유엔평화대 총장은 구소련·동유럽 체제붕괴 전후 과정을 외교적으로 중재한 미국의 대표적 원로외교관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년 가까이 미 국무부의 동유럽, 중앙아시아 문제 협상전문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8월 유엔평화대 총장으로 부임, 이 대학을 반기문 시대 유엔을 대표하는 외교대학원으로 키우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0~12일 방한한 마레스카 총장을 만나 유엔평화대학의 비전과 한국의 역할 그리고 그의 협상경험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 1 세계 분쟁해소를 지향하는 유엔평화대학

―유엔평화대는 아직 한국에 낯선데, 한국 독자들에게 설명을 하신다면?

“1980년 유엔 총회 결의로 코스타리카 산호세에 설립된 외교 중심 대학원입니다. 대학원 과정에 글로벌 평화와 갈등해소, 인간안보, 인권 등 10개 코스가 마련되어 있고 전세계 70개국의 학생 150여명이 공부하고 있죠. 2000년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부임 후 명실상부한 유엔대학으로 키우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엔평화대 명예총장인 반 총장과 2주 전 뉴욕에서 면담을 했는데 학교 육성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더군요.”

―이번 방한기간에 하신 일은?

“한국외국어대와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외교부 인사들과 만나 재정 지원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올여름부터 한국학생들이 유엔평화대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의 학생들을 받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유엔평화대는 유엔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재정 등은 독립적이기 때문에 유럽 및 미주 각국의 기부금에 의존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세계공헌외교를 천명한 만큼 한국도 유럽국가들처럼 유엔평화대에 대한 기부국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유엔평화대가 유엔본부가 위치한 뉴욕에 있지 않고 코스타리카에 존재하는 이유는?

“1980년 유엔 결의 후 코스타리카가 산호세 인근 300㏊의 땅을 캠퍼스로 무상제공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이미 50년 전 군을 폐지한 평화국가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죠. 이후 유엔평화대는 산호세 외에 제네바와 뉴욕, 아디스아바바 등에 지부를 설치했고 세계각국 주요기관과의 연대활동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2 군사적 신뢰구축이 돼야 협상이 성공한다

―동유럽, 중앙아시아 체제 전환과정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미국 외교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외교관 생활 대부분을 적대적인 나라와의 신뢰구축작업에 관여하며 보냈습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주재 미국대사로서 헬싱키 협약에 관여했고, 1991년 소련붕괴 후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동유럽국가들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협상, 구소련 붕괴 후 탄생한 신생국 승인 협상, 나고르노-카라바크 분쟁 해결 등이 대표적이죠.”

―냉전의 붕괴현장을 외교 일선에서 겪으며 체득한 외교적 교훈을 소개하신다면?

“수많은 협상을 거치며 느낀 것은 적대적 국가간의 협상은 상호간에 군사적 신뢰기제를 만들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한반도에도 예외가 없을 것입니다. 남북한이 문제를 풀려면 이같은 상호 신뢰구축이 우선돼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레스카 총장이 외교적 명성을 날렸던 사례는 1994년 나고르노-카라바크 협상이다. 인종, 종교 갈등을 겪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1991년 구소련 붕괴를 전후해 내전에 돌입했는데 특히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위치한 아르메니아계 공화국 나고르노-카라바크 문제가 핵심 이슈였다. 1992~1994년 그는 내전지역을 오가며 협상을 중재해 미국무부에서 ‘풀 메탈 잭’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12일 인터뷰에서 이같은 별명의 연원에 대해 물었더니 마레스카 총장은 “냉전시대 ‘풀 메탈 재킷’이란 영화가 유행했는데, 내가 겁도 없이 분쟁지역을 드나들며 중재한 것을 빗대서 동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며 웃었다.

―나고르노-카라바크 분쟁해결이 남긴 외교적 교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 협상은 엄밀히 말하면 동결된 갈등(frozen conflict)입니다. 물론 전쟁상태가 지속되는 것보다는 낫지만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잠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갈등해법으로는 승리냐, 타협이냐 두 가지가 있는데 승리는 한편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 쪽에서는 한 세대 나아가 한 세기가 지나도록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따라서 타협이 바람직한데, 여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양편을 중재할 제3자 그리고 양편의 양보를 최대한으로 담아낼 합리적인 대안, 협상타결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필수적입니다.”

#3 외교는 기다리며 협상하는 것, 기회가 왔을 때 낚아채는 판단력이 중요

―OSCE주재 미국대사 때 헬싱키 협약 타결에도 관여하셨는데 헬싱키 프로세스가 한반도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요?

“과거 냉전시대 동서진영 대화를 모색했던 헬싱키 프로세스는 오랜 시간을 갖고 진행된 것입니다. 냉전시대 동서진영간 대화는 현재 남북한 대화보다 더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로 깊이 얘기를 들으며 어떻게 신뢰를 구축해나갈 것인가를 모색해야 합니다.”

―6자회담 프로세스가 지지부진해서 많은 사람이 인내심의 한계를 얘기하는 상황인데.

“외교의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오래 협상하면서 중요한 기회가 왔을 때 낚아채는 능력입니다. 내가 보기에 한반도에 그런 기회의 순간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많은 신호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내부 문제를 극복하며 외부로 나오려는 여러 신호(시그널)가 울리고 있는데 뉴욕필하모닉의 평양공연은 그런 시그널 중의 하나입니다.”

―냉전시대가 글로벌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체험한 외교관으로서 글로벌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조언을 하신다면?

“새로운 상황이 다가오면 도전을 하기에 앞서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오랜 외교관 생활에서 배운 철학입니다. 소련붕괴 후 전혀 새로운 국가들이 생겨날 때 이것을 긴급히 워싱턴에 보고해 외교적 승인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관료들은 주저했고, 유럽 외교관들도 그 신생국들을 유럽에 포함시키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변화된 상황에 대해 외교적인 대응을 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제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도래할 때 현장책임자들은 달라진 상황을 빨리 이해해야 하고, 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한반도에도 언제 어떤 상황이 도래할줄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봐야 하고,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잡아서 변화를 주도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변화를 감지하고, 주도적으로 대응해나가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데.

“저는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의 변화와 추세를 읽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온 하드 워커(hard worker)입니다.”

―글로벌 세상에 대해 미국인들은 적극적인 데 반해 한국인들은 아직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인데 조언을 하신다면?

“미국인들은 태생적으로 글로벌 세계를 무대로 생각하고 일하는 데 익숙하고, ‘모든 것은 가능하다’는 낙관적 사고를 하는 게 특징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출신인데 미국에서 성장해 자연스레 그런 정서가 체득된 듯합니다. 글로벌 세상에서 주도적으로 살아가려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존 마레스카 총장은 누구?

193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두살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브루클린에서 성장했다. 1959년 예일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미 해군에 입대, 런던에서 근무 중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6년 미 국무부에 들어가 1994년 은퇴 때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냉전해체기의 역사변동을 지켜봤다.

그는 특히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주재 미국대사로 활동하며 ‘새로운 유럽을 위한 파리 협정’과 ‘22개국 공동선언’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는데, 2개의 문건은 냉전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문서로 평가된다. 그는 이후 미국특사로서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국들과의 수교협상을 이끌었고, 국방부 차관보도 지냈다.

국무부 은퇴 후엔 자선사업가 조지 소로스의 지원을 받아 오픈 미디어 리서치 인스티튜드(OMRI)를 이끌었고, 세계적 기업과 비정부기구(NGO)의 상호협력을 구축하기 위한 글로벌 NGO ‘비즈니스 휴머니터리언 포럼’을 창설, 대표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헬싱키협약을 다룬 ‘헬싱키로(To Helsinki)’ 등이 있다.

인터뷰 = 이미숙 정치부차장 muse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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