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무용가 최승희 업적소개 영상물 방영

북한의 조선중앙TV가 5일 저녁 일제 강점기에 세계적 명성을 떨쳤던 무용가 최승희를 “조선민족 무용계의 한떨기 꽃”이라며 그의 월북 이후 행적을 상세히 소개하는 19분짜리 ‘소개편집물’ 영상을 내보냈다.

북한 무용계는 최근 그의 창작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50여년만에 복원, 내년 재연할 예정이어서 북한에서도 2011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그에 대한 조명 사업이 활발히 전개될 전망이다.

최승희는 광복 직후인 1946년 남편 안막(安漠)을 따라 월북, 활동하다가 1967년 “체제전복을 꾀한” 남로당에 연루된 죄목으로 숙청됐으나 2003년 ‘신미리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됨으로써 복권된 것이 확인됐다. 그의 사망 연도도 불확실했으나 애국열사릉 묘비에 1969년 8월로 적혀 있다.

중앙TV는 ‘현대 조선민족무용 발전에 기여한 무용가로 내세워 주시어’라는 제목의 영상물에서 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승희의 작품 활동을 지원한 일화를 중심으로 최승희의 무용 업적을 소개했다.

방송은 최승희가 1946년 월북한 것이 김 주석이 보낸 “일꾼”으로부터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월북한 최승희에게 김일성 부부가 평양 대동강변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마련해줬으며, 특히 김 주석과 부인 김정숙의 “기대와 관심”이 “각별”했다고 말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금성학원 무용특설강좌 교원 최호섭은 최승희를 ‘고모’라고 부르며, 최승희를 회고하기도 했다.

방송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퇴각할 때 압록강 부근의 고산진에 있던 북한군 최고사령부를 찾은 최승희에게 김 주석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국내에 있지 말고 중국에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하라며 최승희를 중국으로 피신시켜 무용 연구를 계속하도록 지원했다고 말했다.

방송에 출연한 한철 문화성 부상에 따르면 최승희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을 역임했고 공훈배우, 인민배우의 명예칭호도 받았다.

평양무용대학의 리수복 부교수는 최승희의 제자들이 “5대 혁명가극 무용장면들과 4대명작 무용작품들 그리고 여러차례 진행되는 대공연들의 많은 무용작품들을 창작”했다고 말했다.

방송은 그러나 그가 1967년 숙청된 데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채 상당 기간을 건너뛴 뒤 복권과 재평가 과정을 전했다.

김 주석이 최승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갈피에 새겨주었고, 김정일 위원장은 “역사의 낙엽 속에 묻혀버릴 뻔한 그의 운명과 유산들을 되찾아 빛내주었다”는 것.

김 주석이 최승희를 자신의 회고록에 언급했다는 것은 최승희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때가 복권 시점으로 보이나 방송은 구체적인 연도는 밝히지 않았다.

홍정화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서기장은 김 위원장이 “최승희는 조선춤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고 높이 내세워준 데 이어 “명예를 다시 회복시켰으며 “그가 만든 춤들을 교과서로 출판하고 그가 만든 무용을 다시 무대에 올리도록 했다”고 전했다.

북한 중앙TV의 이 방송물에 대해 최승희의 직계 제자인 김백봉 경희대 명예교수의 제자인 김말애 경희대 무용학과 교수는 “최 선생은 궁중무용이나 민속무용 등 과거 무용과는 다른 ‘신(新)무용’의 창시자”라며 “북한 방송에는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최 선생이 월북 이후에도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북한에선 ‘조선예술’이라는 잡지가 한때 매달 최승희 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며 “북한 방송이 그의 월북 이후 업적을 상세히 기록한 영상물을 ‘프라임 시간대’에 내보낸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최승희 무용의 계보를 잇는 ‘3세대’ 입장에서 최 선생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남과 북에서 각각 그의 무용이 어떻게 계승, 발전됐는지를 비교하는 행사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