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막무가내로 일주일에 김정일 특각 기초공사 완료 지시”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북한에서 1979년부터 1987년까지 9년간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복무하며 노동착취를 당한 조충희 씨의 증언을 들어봅니다.

– 조충희 씨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평안남도 평성에서 살았습니다. 2011년 2월에 북한을 떠나 그해 3월 말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 북한 돌격대에서 10여 년간 복무를 하셨습니다. 먼저 북한에서 돌격대란 어떤 조직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속도전 돌격대는 1975년 5월 16일에 조직됐습니다. 그 당시 김정일이 북한 경제 침체를 막기 위해서 사로청, 그러니까 지금의 청년동맹에 과업을 줬습니다.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경제 건설에 투입돼 돌격대 역할을 수행하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북한 각지에서 진행되는 중요 건설, 북한식으로 기념비적 건설에 노동력을 투입됐는데, 이렇게 조직된 건설 부대가 속도전 돌격대입니다.

– 북한에선 고급중학교를 졸업하는 만17세가 되면 대학진학이나 군대, 돌격대, 직장 등에 배치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돌격대가 힘든 곳이라는 건 알고 계셨을 텐데,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보통 고급중학교를 마치면 대학이나 군대를 가는데, 저처럼 돌격대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는 저 같은 (재일교포) 귀국자 출신이나 그의 자녀들은 대학은 고사하고, 믿지 못할 계층이라면서 군대도 안 보냈어요. 신분적 차별에 의한 것이었죠. 돌격대라는 게 굉장히 어렵고 힘든 곳이라 누구나 잘 가려고 하지 않지만, 저는 할 수 없어서 간 겁니다.

– 조충희 씨가 복무한 돌격대는 어떤 곳이었나요?

특정 지역에 정확히 지정돼 있진 않고요. 북한 각 지역에서 진행되는 건설에 동원돼 일을 하는 식입니다. 저는 평양에 있는 인민대학 집단 건설에도 참가했고요, 대동강 구역에 있는 텔레비전 건설 공장 건설에도 참가했습니다. 제대 전에는 광복거리 건설도 했습니다. 돌격대는 군대처럼 편제가 돼 있는데, 저는 중앙청년동맹 직속 속도전 돌격대의 1여단 출신입니다. 여단은 보통 14개 정도 되는데, 지금은 각 도별로 도 청년돌격대가 있습니다. 한 도별로는 11개에서 12개 여단이 소속돼 있고요. 전국적으로 4, 5만 명의 돌격대원들이 있는 것입니다.

– 거의 10년 가까이 일했으니 동원됐던 주요 건설 작업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닐 텐데요. 어느 정도 힘든 일을 했었나요?

1979년에 있었던 일인데요, 그 해 여름에 평양시 대동강구역 미림 쪽 작은 섬에 동원이 됐습니다. 김정일이 그 섬에 특각을 건설하려던 겁니다. 저희 여단엔 다섯 개 대대가 있었는데, 저는 2대대에 속해 있었어요. 그 당시에 저희 대대는 그 중에서도 전투력이 좋다고 평가가 돼서 특각 건설 사업에도 동원이 됐습니다. 그런데 기초공사를 일주일 안에 끝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일주일간 속도전으로 일을 하느라 한 잠도 못 잤습니다. 특히 공사의 비밀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기계를 전혀 투입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삽과 곡괭이만 쥐어주고 우리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을 해야 했죠.

저희 대대가 300명 정도 됐는데, 300명이 일주일간 잠을 한 숨도 자지 않고 일을 했다고 하면 상상이 가시나요? 휴식이라고 주는 것도 5분 내지 10분에 불과했는데, 이 때는 어디에 앉지도 못하고 그저 서서 물 한잔 마시는 게 전부였습니다. 밥을 먹을 때만 앉을 수 있었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밥 먹을 기력도 없더군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잠이라도 더 자고 싶은데, 잠깐 눈 붙이려고 하면 빨리 밥 먹고 일을 하라고 독촉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일주일 동안 기초공사를 마치긴 했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공사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가 공사 막바지 즈음 빨치산 쪽 사람들이 와서는 사탕과 빵을 먹여주며 이 공사가 무슨 공사인지 말을 해주더라고요. 그 때서야 우리가 김정일의 특각을 건설했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기초공사를 끝내자 고생했다면서 불고기 파티를 열어줬는데, 그 누구도 불고기를 먹지 않고 모두 쓰러져 잤어요. 공사를 지휘하고 단속하던 사람들도 못 잔 건 마찬가지니 다 같이 쓰러져 자버렸죠. 지금 생각해도 당시 어떻게 그 일을 감당했는지 상상이 잘 안 돼요. 젊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 돌격대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여름을 기준으로 말씀 드리면, 아침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기상해 조기 작업에 나섭니다. 아침 운동 겸 조기 작업을 하는 것이죠. 이후엔 신문을 읽는 독보 시간을 갖고, 아침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군대식으로 줄을 서서 노래를 부르며 가야 하는 데요,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손발이 잘 맞지 않으면 운동장 몇 바퀴를 돌게 합니다. 밥 한 그릇 먹겠다고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죠. 밥을 먹고 나면 아침 검사라는 걸 합니다. 옷차림이나 작업 도구를 검사하는 겁니다. 옷은 빨치산 식으로 입었는데, 완전한 군복은 아니고 노동적위대가 입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나가면 9시부터 작업에 착수하게 되는데요. 12시까지 일하고 점심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 때는 1시간 정도 시간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1시간은커녕 30분 안에 먹어야 했던 것 같아요. 식사는 보통 운반식사로 이뤄졌습니다. 밥을 해주는 여성 대원들이 밥을 날라다 주는데, 그럼 현장에서 밥을 허겁지겁 먹고 다시 일에 나서야 하는 겁니다. 밥은 주로 마른 밥을 비벼서 줬습니다. 운반하기 쉽도록 그런 음식을 내준 것이죠. 그렇게 점심을 먹고 바로 일을 시작하면 저녁 7시에 작업이 끝나야 했는데요. 그런데 대체로 7시를 넘기고는 했습니다. 저녁밥도 안 먹이고 10시까지 일을 시킨 것이죠. 저녁밥까지 주면 더 일을 해야 했어요. 자정이 돼서야 일이 끝날 때도 많았습니다.

– 밥은 충분히 나오나요? 그렇게 고강도 노동을 견뎌내려면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야 할 텐데요.

원래 국가 공급량은 하루 700g입니다. 그런데 다 공급되지 않아요. 별의별 규정에 의해 실제 공급되는 건 580g 정도에 그칩니다. 그걸 세 끼로 나누면 200g도 안 되는 양이죠. 점심에는 국수를 줄 때도 있었는데, 국수를 하루 전에 불려두기 때문에 정작 먹을 때는 손가락만큼 퉁퉁 불은 걸 먹어야 했어요. 그런 국수를 먹은 날이면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돼 다 소화가 됐습니다. 그래서 돌격대원들은 자체 해결로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가을철이면 돌격대가 지나가는 논밭은 거의 폐허가 된다고들 했어요. 다 훔쳐 먹기 때문이죠. 또 짐승을 피신시켜야 한다는 우스개도 있었습니다. 돌격대가 짐승까지 잡아먹는다면서 말이죠.

– 월급은 어느 정도 지급됐나요?

제가 돌격대에 입대했을 때는 55원 54전을 받았습니다. 당시 보통 근로자들이 80원 내지는 100원을 월급으로 받았는데, 저희는 그 절반만 받은 셈이죠. 물론 일하는 도중에 밥도 먹여주고 옷도 준다는 이유였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 월급을 받고선 저축이라는 게 불가능했어요. 경제개선 7·1조치 이후에는 월급이 올라 1000원 내지 2000원씩 받았는데요, 문제는 쌀 1kg가 5000원 가까이 할 정도로 물가 또한 오르니 도무지 뭘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나마 돌격대는 밥을 먹여주지 않느냐고들 했지만, 사실 굶는 것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 식사량도 적고 질도 나빴으니까요.

– 대형건설 사업을 할 때는 건설 장비도 중요할 텐데요. 건설 장비는 어떤 것들이 지급됐나요?

돌격대는 건설 장비 없이 일했습니다. 맨몸 노동을 해야 했죠. 오로지 삽과 곡괭이만 갖고 작업에 투입됐어요. 어느 건설이든 작업을 할 때 전문 건설 기업소가 이 사업을 맡게 되는데, 기업소 사람들만 장비를 갖고 하고 돌격대들은 삽과 곡괭이만 들고 맨몸으로 일했습니다. 어떤 건물을 짓느냐에 따라 투입되는 장비가 다르긴 했는데요. 아파트나 인민대학습당을 지을 때는 삽이나 곡괭이, 해머(망치), 각종 시멘트 미장 도구, 마대 등이 제공됐습니다. 하지만 기본은 육체노동이었죠.

– 안전 장비는 제대로 지급됐나요? 

안전모가 있기는 있었는데, 싸리나무로 엮은 것이었어요. 며칠만 써도 다 헤지는 수준이었는데, 그마저도 일 년에 한 번 공급됐죠. 그걸 쓰고 있다가 큰 바위라도 머리 위에 떨어지면 살아남을 수나 있겠어요? 반면 중대장 이상 지휘관들은 고강도 플라스틱으로 된 안전모를 썼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봐도 지휘관과 일반 돌격대원들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어요. 나중에는 돌격대원들이 하도 죽어나가니까 현장에 노동 안전 감시원이라는 사람을 붙여주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는 갑작스럽게 흙이 무너지면 그저 옆에서 호각을 불어 피신하라는 신호를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 기억에 남는 사고가 있나요?

겨울에는 땅이 얼어서 일을 하기가 어려운데, 그럴 때면 땅 밑을 파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땅을 파서 아래로 들어간 두 돌격대원이 흙이 무너지는 걸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파묻혀 죽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튼튼한 대원들이라면 빠져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영양실조 상태였어요.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은 것이죠.

– 그렇게 작업 중에 다치거나, 혹은 사망하게 되면 그에 맞는 치료나 보상이 이뤄지나요?

북한은 원래 시스템적으로는 무상치료입니다. 그래서 다치면 병원에 보내주기는 해요. 그런데 병원이 너무 허술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긴 어렵습니다. 저와 함께 돌격대 생활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집안에서도 외아들이라 가족들의 기대가 컸어요.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영웅칭호도 받았고요. 그런데 하루는 친구가 공사 중 두 다리가 절단돼 병원에 실려갔는데, 병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혈액이 없어서 치료가 진전되지 않는 거예요. 친구의 혈액형은 B형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저도 B형이라 피를 많이 뽑아줬습니다. 하지만 끝내 살아나지 못하더라고요. 친구가 죽기 전에 제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장가도 못 가고 죽는구나’ 하며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제가 정말 격분했던 건, 이후 제 친구의 사연이 노동신문에 실렸는데 죽기 전 ‘철길 공사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선전하지 않겠어요? 제 친구의 죽음을 그렇게 선전에 쓰는 걸 보면서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 공사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공사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초과수행을 해야 하거든요. 몇 월 며칠까지 작업을 마치라고 하면, 꼭 그보다 하루 전에 일을 끝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24시간 교대를 시키며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안 자더라도 무조건 목표를 달성해야 했죠. 상급 지휘관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목표를 달성하라고 독촉했습니다.

– 다시 17살로 돌아간다면, 그 때도 돌격대 생활을 택할 것 같나요?

저는 지금도 대체 무슨 힘으로 10년 가까이 돌격대 생활을 버텼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가끔 돌격대 꿈을 꾸기도 하는데요, 정말 악몽이 따로 없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고 한국에 온 지 꽤 됐지만, 여전히 돌격대 생활이 꿈에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돌격대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면 잠자리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고는 합니다.

돌격대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 따르면. 북한에서 돌격대는 군대처럼 약 10년간 복무를 하면서 무보수에 가까운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돌격대원들은 제대로 된 안전 장비 하나 없이 매일 10시간 넘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현대판 노예노동이라 불리는 북한 돌격대, 북한 당국은 돌격대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을 당장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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