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두 명의 태양 때문에 과격한 정치 온난화 진행

지난 3월 26일 한국 초계함 ‘천안함’ 격침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영해 내(서해 북방한계선 남측해역)에서 북한 어뢰공격을 받고 동함 승무원 46명이 ‘전사’한 대사건이다.


‘테러’와 ‘전사’에 괄호(‘ ‘)를 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정규 전쟁행위였다면 적군이 기습공격 전과(戰果)를 대대적으로 공표했을 것이다. 또 보통의 테러행위였다면 실행범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범행성명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과에 대한 공식표명도 없거니와 범행성명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은 일관되게 ‘결백’를 주장하면서 후안무치하게도 ‘조사단’ 파견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사건은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전쟁인지 테러인지 뚜렷하게 판명되지 않는다. 북한은 지금까지 국제사회의 비판과 경고를 무시하고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실험을 계속해 왔다. 그런 국가가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대규모 테러를 감행했다. 전대미문의 폭거이며 상식을 벗어난 폭주다. 바로 여기에 천안함 사건의 의문을 푸는 열쇠가 숨겨있다.


‘의문’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실행범인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북한 범행설에 대해 의문을 가질 여지는 없다. 진정한 의문은 북한의 범행동기에 있다. 어떤 손익계산이 작용했고, 무엇을 노린 것인가? 그 배경과 동기를 찾는 작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번 사건이 초래할 결말을 예측해 보기로 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 3가지 사안에 대한 ‘종말의 시작’이다.


첫 번째는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의제로 삼은 ‘6자회담’이 종말의 시작에 들어선 것이다. 좀 무리해서 말하자면 6자회담은 이미 종료되었다.


설사 중국과 러시아가 뭐라 말한다 해도 객관적인 사실로서 북한 자신이 이번 격침테러로 6자회담을’폐기’시킨 것이다.


한국은 6자회담 참가국이다. 협상 상대에게 대규모 테러를 가한다는 것은 완전히 궤도를 이탈한 만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 묵묵히 6자회담 동참을 요구한다면 그 자체가 폭거라 할 수 있다. 북한은 그것을 알면서도 격침테러를 감행했다.


북한이 분명히 사죄하고 책임자를 처벌한다면 6자회담은 재개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사건을’날조’라고 주장할 뿐만이 아니라 16년 만에 ‘서울 불바다’ 발언을 재개하며 전면적 군사타격을 공언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대규모 폭파테러사건을 일으켰다. 한국대통령 폭살을 꾀한 아웅산 사건(83년)과 서울올림픽 방해를 노린 대한항공기 사건(87년)이 그것이다. 두 사건 모두 현행범이 체포돼 범행을 자백하고 있다. 그래도 김정일은 뻔뻔스럽게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번에는 실행범이 감쪽같이 도주했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 증거를 축적해도 북한이 범행을 인정할 리가 없다. 애당초 넓은 의미에서 범인은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이다. 따라서 책임자 처벌이 가능할 리가 없다.


이번 폭거는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하고 각종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였기에 가능한 만행이었다. 핵과 미사일이 있기에 설사 범행이 노출된다 할지라도 군사적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격침테러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폭거는 북한이 핵무기 포기에 응할 의사가 없음은 물론 6자회담 복귀 의사도 없음을 표명한 것과 같다. 북한은 천안함과 함께 6자회담마저도 격침시켰다.
  
그렇다면 6자회담 개최는 이미 무의미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한미일 3개국을 중심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 북한에 핵무기 포기를 압박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천안함 격침사건 여파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사건 후에 실시된 6·2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뜻밖의 참패를 맞보았다. 그 요인 중 하나로서 전쟁을 꺼리는 젊은 층 유권자들의 표가 야당으로 흘러간 사실을 들 수 있다. 징병제가 있는 국가에서 좋아서 전쟁을 치르고자 하는 젊은이는 없다. 하지만 한국 국민에게 있어서 북한과의 싸움을 ‘전쟁’이라고 봐야 하는가? 


정확하게 말하면 억압과 빈곤에 허덕이는 북한인민을 구하는 ‘해방투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10년간에 걸친 친북좌파정권이 북한보도를 왜곡하고 안보교육을 게을리 해온 대가가 바로 이것이다. 젊은이가 정의감을 잃은 국가는 미래가 없다.


두 번째는 북중군사동맹이 중대한 기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국은 1961년에 ‘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핵심은 제2조 ‘자동 참전 조항’에 있다. 즉  “일방이 하나의 국가 또는 몇 개의 국가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해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면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군사동맹은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여 참전한 6·25전쟁과 휴전 협정 직후부터 시작된 동서냉전의 역사적 유물이다. 북한은 같은 해에 소련과도 군사동맹(소북 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으나 91년 소련 붕괴로 사실상 실효되었다(정식으로는 2000년에 파기). 그러나 중국은 현재도 북한과 군사동맹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은 시대착오적인 조약을 유지하면서 과거 동서냉전과 중소대립시대에는 물론, 현재도 이득을 얻고 있다. 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이지도 않는 적당한 경제원조와 군사동맹으로 북한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이로 인해 6자회담(2002년 발족)에서 의장국 자리를 획득, 중국의 존재감과 외교적 위신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북한은 2006년 첫 번째 핵실험을 실시했다. 중국은 기르는 개에게 손을 물리듯이 유엔에서 궁지에 몰렸다. 어쩔 수 없이 중국은 유엔안보리 대북제제결의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략물자인 석유와 식량을 북한에 계속해서 원조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앞장서서 제재 위반을 한 셈이다.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 2009년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번 천안함 사건은 중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열심히 협상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 발생했다. 6자회담 참가국인 북한이 같은 참가국인 한국에 테러행위를 감행한 것이다. 이로서 의장국인 중국의 체면이 깍였다. 더구나 북한의 악의는 명백했다. 북중 군사동맹과 6자회담 재개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 직전에 후진타오는 김정일을 불러냈다(5월 전격訪中). 김정일은 사건 관여를 끝까지 부인했으나 후진타오는 이에 대해 가시 돋친 주문을 했다. ‘양국의 내정과 외교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의견교환을 하자’고 제안했고, 김정일은 이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는 이를 가리켜 ‘중국이 이례적 주문을 했다’ ‘양국간에 심각한 금이 갔다’고 추측했다. 중국이 유엔안보리 신(新) 제재결의에 지지로 돌아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제안’은 북중 상호원조 조약 제4조(상호협의조항)를 재차 꺼집어냄으로서  김정일에게 군사동맹의 존재와 의의를 새삼 상기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서 북한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한편  김정일의 ‘동의’는 제2조와 제4조 사이에 담긴 제3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제3조는 ‘타방의 체약국에 대해 어떤 집단, 행동 또는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은 2006년 유엔안보리 결의 찬성을 상기시킴으로서 천안함사건에 대한 향후 대응에 못을 박았다.


이와 같이 이번 북중정상회담은 양국간 군사동맹을 각자 재점검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호간에 재확인을 필요로 하는 것 자체가 북중 군사동맹이 이미 내용연수(耐用年數)가 지났음을 나타낸다. 북한은 중국을 필요로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의 대칭성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 군사동맹은 ‘숙명적 인연’으로서 아무리 기간이 지나도 양측 합의 없이는 실효되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후진타오의 제안은 내정간섭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동의한 것은 북중군사동맹의 고마움을 알고도 남기 때문이다. 5월 전격 방중 당시 김정일은’지도자가 바뀌어도 대를 이은 우호관계의 유지·발전’을 후진타오에게 호소했다.


권력계승에 즈음하여 김정일이 아들 김정은에게 상속할 국내 재산 목록에는 ‘핵과 미사일’ 이외에 눈에 띌 만한 것은 없다. 한국의 국내총생산과 비교 시 3%에 불과한 피폐해 버린 경제. 김일성시대의 충신들로 이루어진 원로들로 인해 완전히 경직화된 정치. 그리고 수세대에 걸쳐 구형된 골동품급 군비. 신(新)체제의 안정적 출범을 위해서는 해외에 구축한 자산을 상속하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 그것은 바로 북중군사동맹이다.


김정일은 아픈 몸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 목적은 긴급 경제원조 요청만이 아니다. 군사동맹유지를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천안함 격침사건에 대한 해명은 피할 수 없었다. 김정일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고 후진타오의 발목(군사동맹)을 붙잡고 늘어졌다. 더욱이 북중 국경에서 최근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중국인 밀수상인 3명을 사살한 사건에서는 신속히 사죄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한편 후진타오는 상당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대규모 민생자원은 약속하지 않고 10만톤 정도의 식량, 약간의 가솔린과 화학비료밖에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도 북한은 김정일 귀국 당일에 ‘중국지도부의 환대 및 쌍방의 친선확인’이라는 김정일의 ‘감사전문’을 발송하고 다음날 ‘노동신문’은 김정일 방중을’획기적 사변’으로 평가하며 과대선전에 주력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은 김정일이 귀국한 후에도 아무런 추가동향도 발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후진타오가 품은 불만이 어느 정도란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중국은 북한이 생각하는 만큼 해주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기대하는 만큼 움직이지도 않았다. 천안함 격침사건에 관하여 중국은 ‘객관적이며 공정한 판단’이라든가 ‘어느 쪽도 옹호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테러사건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이는 가해자 감싸기를 의미할 뿐이다. 중국은 북한과 한국 사이에 끼여서 고민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책임 있는 대국으로 인정받을 것인가 아니면 무책임한 대국으로 낙인찍힐 것인가 기로에 서있다.


그래도 중국은 ‘중립’적 입장을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인다. 반세기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동맹관계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김정일을 감안하여 중국은 북한에 ‘마지막 기회’를 부여할 작정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정일 방중 시에 원자바오 수상은 북중국경지역 인프라정비(산업기반건설)를 약속했다. 총액 10억달러 규모에 달하는 장기개발원조를 미끼로 북한을 개방개혁으로 끌어들여 위험한 손톱과 뿔을 천천히 뽑아 낼 속셈이다.


과연 중국이 의도하는 작전이 주효할 것인가는 불투명하다. 지금 북한에게 있어서 10개년(장기간이 소요될) 개발계획 등은 안중에도 없다. 눈앞에 닥친 권력세습 작업에 혈안이 되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끼를 문다는 것은 제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손익계산을 할 수 있을 때이다.


이것은 후계 준비작업 중단 혹은 연기가 전제조건이 된다. 더욱이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염두에 두고 십년 단위의 장기 안정된 ‘중계정권’이 과감한 국내 경제개혁(시장경제 전면도입)을 단행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 까지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북한이 기존의 역주행 노선을 계속한다면 중국의 의도는 불발로 끝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은’김씨 왕조’를 단념하고 북중 군사동맹은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된다.


세 번째 ‘종말의 시작’은 북한 김씨 왕조 그 자체이다. 2008년 김정일이 쓰러진 이후 북한은 혼란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대한 결단을  뒤로 미루기만 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 후계내정(2009년 3월 초순)이후 부터 갑작스럽게 주변 정세를 악화시키고 있다. 같은 폭주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상태에서 보다 더욱 위험한 역주행 상태로 옮겨졌다.


역주행의 전형은 작년 11월 통화개혁(디노미네이션 실시)과 올해 3월 천안함 격침사건이다. 전자는 자국민에 대한 일종의 경제테러이며, 후자는 한국에 대한 군사테러이다. 양자를 합치면 통제경제와 대남파괴공작으로의 노선회귀이다.


역주행의 직접적인 계기는 김일성·김정일의 화신(化身)으로서 김정은을 서둘러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시계바늘을 30년 이상 되돌리면서 늙고 병든 김정일이 마치 회춘한 것처럼 자국민과 한국의 좌익세력을 착각시키는 환술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체제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김정일의 급병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구소련 붕괴에 의한 경제원조 단절과 동서냉전 종식이라는 국제정치 환경의 급변에 있다. 북한인민은 환경변화에 적응하여 90년대 후반 대기근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암거래 시장을 확대시키는 시장경제로 진화의 길을 선택했다.


한편, 생활난과는 무관한 유한계급(김일성시대부터 행세해 온 노간부 계급)은 시장경제로의 변화에 대한 정신적 불안과 과거에 대한 향수로 인해 안이한 퇴화의 길을 택했다. 김정일은 삼남 김정은 후계 내정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노간부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진화와 퇴화의 양자택일의 길에서 자멸로 향하는 퇴화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천안함 격침사건에는 북한이 퇴화를 선택한 각인이 뚜렷하게 찍혀 있다. 디노미네이션정책(통화호칭단위변경)이 그것이다. 격침테러는 디노미네이션 실패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디노미네이션 실시 당초 거의 모든 언론과 전문가는 문제의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인플레이션 대책이라든지 일리 있는 경제정책이라든지 하는 기묘한 해설이 유포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시장경제를 송두리째 뽑아내고 지령(指令)경제로의 회귀를 의도한 것이었다.


과거 배급제를 지탱한 것은 구소련의 막대한 경제원조였다. 그러한 토대가 사라진 현재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불과하다. 붕괴된 배급제를 보완 및 대체해 온 시장경제를 파괴하면 생활필수품의 유통과 공급 그 자체가 붕괴한다. 그렇게 되면 악성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경제정책의 과오뿐이라면 쉽게 원래상태로 되돌림으로서 혼란은 비교적 간단하게 수습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김정은을 위해 화폐개혁을 성공시키고 반항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짓밟아라’


디노미네이션실시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은 공안기관 간부와 매제 장성택에게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디노미네이션 강행의 주모자는 김정일과 김정은 두 부자이다. 그러나 사태수습이 늦어져 심각한 경제혼란을 초래했다. 디노미네이션 실시 후 3개월간 물가는 12배나 뛰었다. 한편 서민들의 예금 자체는 종이쪽지처럼 되어서 시장활동에서의 수입원을 잃고 구매력이 격감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은 이중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전례없는 국민의 동요와 불만고조이다. 또 하나는 후계작업을 위한 김정은 업적 만들기에 시작부터 크게 차질이 생긴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대규모 숙청바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노미네이션 실패의 책임전가, 다시 말해 도마뱀 꼬리자르기 식으로 노동당 대간부가 총살되고, 100여명에 가까운 간부가 추방되었다. 
 
이번 천안함 격침테러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감행되었다. 목적은 군사적 긴장을 극도로 높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민에게 배고픔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함과 동시에 군사면에서 김정은의 새로운 업적을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제3자가 보면  정말 우습고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국내적으로는 진지하고 합리적인 동기가 된다. 북한의 국내정치는 김정은 후계내정 이후 그 만큼 과열되어 있다.


지는 태양 김정일과 뜨는 태양 김정은. 두 태양이 비춤으로서 북한정치는 과격한 온난화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뜨는 해인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 고조는 북한 내에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에는 폭주로 나타난다.


김정일이 2대째 후계자로 내정된 30~40년전과 거의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김정일이 대두되기 시작한 1976년, 북한은 중공업을 포함한 모든 경제 분야에서 한국에 뒤쳐진다. 그 전년도에는 베트남전쟁이 종결됐다.


미군이 한국과 일본의 기지로 철수해 한반도에서 베트남전의 굴욕을 설욕하기 위한 체제를 확고히 했다. 이러한 커다란 환경변화로 인해 북한은 대남적화전략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규전을 포기하고 대신에 대남파괴공작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76년부터 일본인 납치사건이 빈발하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한 아웅산사건과 대한항공기사건은 떠오르는 태양 김정일이 주도한 테러사건이었다.


북한에서 국내정치 온난화가 계속되는 한 역주행이라는 위험한 폭주는 쉽게 멈출듯 싶지 않다. 해결책은 2개의 태양 중 하나라도, 또는 가능하다면 양쪽 모두가 수평선 너머로 빨리 지는 것이다.


천안함격침 사건 조사결과 발표 직후인 6월 7일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1년에 2차례의 국회(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다. 동 회의에서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최고의사결정기관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장성택은 이것으로서 명실공히 권력서열 제2위로 올라선 격이 되었다.


김정일이 태양이라면 장성택은 달(최측근)이다. 또한 뜨는 태양 김정은에게 있어서도 장성택은 달(후견인)이다. 최근 국방위원회 인사개편과 동시에 총리 교체를 포함한 대폭적인 개각이 실시되었다. 장성택은 김정일로부터 디노미네이션 실패이후 사태 수습을 이미 일임받았다. 그러한 장성택의 주도로 국방위원회와 개각인사가 단행되기 직전, 시장활동 재개가 대폭 허용되고, 무역 규제가 완화하는 조치가 당국에 의해 추진됐다.


분명히 후계자는 김정은으로 내정되어 있다. 하지만 정식결정은 아직이다. 만약 김정일이 후계발표이전에 사망한다면 후계자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한 정식발표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김정은이 실권을 완전장악하기까지 10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장성택이라는 달이 북한의 밤하늘을 비추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중계적 구원등판으로 끝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본격적인 정권이 될 것인가? 그것도 언제 김정일의 수명이 다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물론 장성택이 정점에 올랐다고 해도 가당찮은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혈연관계가 없는 장성택이 정치무대에서 주역을 맡게 된다면 적어도 세습왕조는 단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