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대량아사시 ‘정치적 소요’ 일어날까?

북한과 같이 ‘도시형 기근’을 겪는 국가들에서 쿠데타 발생이라는 공통적 특징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이 결과적으로 정치적 파급력을 갖게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앤드루 나초스(Andrew S. Natsios) 전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지난 15일 미 하원 재무위원회의 세계식량위기 관련 청문회에서 “(기아 사태가 발생하면) 도시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가끔 정치적 폭발에 이르기도 한다”면서 북한 내 소요사태 발생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쳤다.

그는 아프리카의 경우를 예로 들며 “지난 1970년대 초 아프리카 사하라 남부의 사헬지역에서 대기아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기근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13개 국가 가운데 11개 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에서의 지난 1990년대 중반 250만 명이 굶어죽은 기아 사태는 당시로서는 아주 드문 ‘도시형 기아’였다”며 “현재 북한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아 사태 또한 ‘도시형 기아’가 될 것 같다. ‘도시형 기아’는 주민들이 조용히 죽어가는 ‘농촌형 기아’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중반 대아사 사태 이후 최악의 식량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북한에서도 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소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을까?

◆ 1990년대 대아사에도 정치적 동요 없어=북한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최악의 식량난을 경험했다. 1997년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당시 약 300만 명의 주민들이 식량부족과 그에 따른 1, 2차 피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300만 명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도 쿠데타는커녕 국가를 향해 비난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이 시기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빗대어 ‘고난의 행군’으로 지칭하고, 정권 차원의 명백한 경제실정으로 빚어진 대량 아사 사태를 정치적으로 미화하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만 해도 북한 내부의 통제 시스템은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외부 정보 통제가 철저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대량 아사 사태의 책임을 김정일 정권에 돌릴만한 정보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설명이다.

국가안전보위부(주민감시기구) 출신의 탈북자 이정기(2002년 입국) 씨는 “1990년대 중반에는 식량난이 미국의 경제봉쇄 때문에 발생했다고 자기 위안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이렇게 믿었던 사람들은 굶어죽으면서도 ‘장군님 안녕하신가’라고 할 정도로 물정을 몰랐다”고 증언했다.

북한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탈북자 홍민국(2004년 입국) 씨도 “평생 세계에서 우리가 제일 잘 산다는 선전을 듣다보니 거기에 세뇌되어 버렸다”며 “이 세상에서 굶고 있는 나라가 우리뿐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고, 나라에 원망하는 마음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식량난이 극심해질수록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당국 차원의 공포 정치 또한 강화되었기 때문에 불만 세력의 형성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북한 정권은 특히 이 시기에 공개처형을 빈번하게 실시함으로써 주민들의 공포심을 극대화했다.

이 씨는 “나라가 먹여 살릴 수 없으니 암묵적으로 먹고 사는 일은 묵인했지만, 총화는 철저히 했다”며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매년 2천 명 이상씩을 처형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정도로 통제가 강화됐었다”고 전했다.

고위 관리 출신인 박기욱(2000년 입국) 씨는 “북한은 국가나 통치자를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자식이나 주변 친척들까지 피해를 입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 수 없다”면서 “조밀한 주민 감시망이 가동하기 때문에 당국에서도 위기 상황마다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 또다시 불어 닥친 식량난…체제 이완 막기 위해 총력=조선중앙통신(중앙통신)은 14일 “현 시기 인민들의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는 김정일의 말을 전했다. 이 같은 발언은 현재 북한의 심각한 식량상황을 김정일 스스로가 시인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은 지난 17일 미국이 대북 50만t 식량지원을 발표한 지 12시간 만에 중앙통신을 통해 “미국 정부의 식량 제공은 부족되는 식량 해결에 일정하게 도움이 될 것이며, 조(북)·미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이해와 신뢰 증진에 기여할 것”이라며, 사실상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 외에도 북한의 각종 선전매체들은 미국의 식량 지원 소식을 신속하게 전하는 등 과거 식량 문제의 원인을 미 제국주의의 탓으로 돌리며 맹비난하던 태도에서 180도 바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의 이러한 태도는 북미관계가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극심한 식량난으로 야기될 체제 불안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에게도 악화된 경제상황에서 곧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 심리적 동요를 막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아울러 북한 당국은 최근 식량난에 전력난과 식수난까지 겹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한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상교양’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대북지원단체인 ‘좋은벗들’은 지난 15일 소식지를 통해 “식량난이 심각한 와중에 사상교양은 더 강화되고 있는 양상”이라며 “주민들의 표현대로라면, 전국 어디서든 눈만 뜨면 눈 감을 때까지 사상교양으로 정신이 없다”고 전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경제 강국 건설을 위해 선전선동 사업을 강화할 것”을 당 조직에 주문하는 등 북한 당국은 최근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 식량난 악화, 정치적 불안정으로 이어질까?=대량 아사 사태 이후 지난 10년간 북한 내부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대북 라디오 방송의 활성화와 CD(드라마나 영화) 등의 유입 등으로 외부 정보의 유통이 빠르게 일어나고 있으며, 주민들도 국가에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먹고 사는 길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이정기 씨는 최근 북한의 민심에 대해 “지난 10년간 가혹한 생활고를 겪으며 악만 남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굶어죽는 원인이 집권자들이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에 국제사회와 담을 쌓고 경제개방을 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홍민국 씨의 경우 “이전에는 당과 김정일만 믿고 있었다면 지금은 겉으로는 믿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힘을 믿고 있다”며 “지금 많이 곤란한 것은 사실이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이전까지 대량 아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식량 위기상황이 악화되면서 지도층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탈북자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최근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아사자가 발견되기 시작하며 과거와 같은 아사 사태가 재발되지 않을까라는 우려감도 서서히 번지고 있다고 한다.

정권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쏟아내는 모습 등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 그러나 이 씨는 “가족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면 우리가 굶는 것은 김정일 때문이라는 말도 하며, 간부들 사이에서는 ‘하나(김정일)만 없어지면 된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불만이 아무리 높더라도 아프리카 지역처럼 정치적 소요 사태가 북한 내에서 쉽사리 발생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의 경우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 통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으며, 체제 이완 현상이 조금씩 발견되고는 있지만, 일당·일인 독재 체제를 무너뜨릴 정도로 광범위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기동 책임연구위원은 19일 ‘데일리엔케이’와의 통화에서 “북한 내 ‘도시형 기근’이 발생하더라도 정치적 움직임으로 비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며 “김정일 스스로도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보위부나 인민보안성 등 통제기관에 대해 나름대로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은 “90년대 당시 기근 사태 때도 ‘도시형 기근’ 현상이 나타났지만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조직화 되어 체제에 도전하기보다는 직장이탈 등 자구적 차원에서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흩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며 체제에 대한 불만이 집단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한 “10년간 주민들의 의식이 많이 변화하긴 했지만 이는 먹고 살기 위한 경제적 의식의 변화”라며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의식이 성숙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고 덧붙였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김윤태 사무총장도 “북한의 식량난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90년대 중반처럼 대량아사로 이어질 가능성은 적다”면서 “일부 아사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이것이 정치적 소요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다만 “식량난이 일부 해결되면서 줄어들었던 재중 탈북자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은 있다”며, “그러나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국경연선 통제를 강화하고 있어 과거처럼 탈북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