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단천 벽보투쟁’ 이전과 확 달라졌다

‘선군정치 바람에 백성이 굶어 죽는다. 군대들에게만 주지 말고 인민들부터 쌀을 달라’

북한 장마당에 김정일 정권의 선군정치를 비판하고 쌀을 달라는 내용의 벽보가 나붙었다. 지난 5월 함경남도 단천역 근처 장마당에 붙었던 이 벽보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 통제와 가혹한 폭력을 뚫고 피어난 저항과 투쟁의 새싹이다.

김정일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가혹한 폭력이다.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저항자 본인 뿐 아니라 가족과 친척, 선후배까지도 생명을 잃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폭력에 내몰리게 된다. 다른 하나는 철저한 사상적 기만이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의 머리속에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사상을 주입한다. 수령을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악마라고 배운다. 외부정보는 완벽하게 차단된다.

더구나 북한 주민들은 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에서는 레닌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도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짐승으로 살아가는 길 이외의 모든 길이 막혀 있는 사회가 북한의 수령 독재 사회다. 공포와 절망으로 뒤덮인 사회에 내걸린 저항의 벽보가 눈물겹게 반갑고 소중한 이유다.

단천의 벽보가 특히 반가운 것은 기존의 저항 방식과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회령에서 발견된 <자유청년동지회>의 反김정일 격문들과 비교해보자.

첫째, 원색적인 정치적 비난 대신 주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담고 있다. 회령의 격문들은 ‘김정일은 독재자다’, ‘독재정권 몰아내자’, ‘인민들이여 싸워서 자유민주 되찾자’ 등 격앙된 정치적 구호를 나열하고 있었다. 반면 단천 벽보의 내용은 한마디로 ‘쌀을 달라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의 절박한 생존 요구가 담겨 있다. 그 절박성만큼 묵직한 저항력이 묻어난다.

둘째, 벽보가 붙은 장소도 다르다. 회령의 격문들은 마을 입구의 한적한 다리와 공장의 후미진 구석에 붙어 있었다. 단천의 벽보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단천역 근처 장마당에 붙었다. 북한 주민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붙인 것이다. 외부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부 주민에게 알리고 그들의 지지를 얻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단천 벽보를 둘러싸고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일부 주민은 벽보의 내용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회령 격문의 경우, 사람들이 격문을 보았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았었다. 벽보를 붙이고, 벽보를 보며 의견을 교환하고, 벽보의 내용에 공감하는 행위들은 과거 북한 주민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행위들이었다.

저항이라는 ‘상상불가침’의 현상들이 북한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탓이다.

첫째, 북한 주민들이 생존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에 성인 유랑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집에 있으면, 월급 없이 일해야 하고, 감시받아야 한다. 배급도 끊긴지 오래다. 더 이상 집과 생활 터전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차라리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떠돌며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낳은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단천의 벽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몰린 북한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둘째, 김정일 독재의 통치력 약화를 엿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반김정일 벽보가 나붙고 주민들이 그것을 보고 의견을 교환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김정일 체제의 양대 통치수단인 강력한 사상통제와 잔인한 폭력의 힘이 줄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최소한 북한 주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누르기에 서서히 힘이 부치는 국면에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포와 절망으로 뭉친 수령독재의 바위를 뚫고 피어난 단천의 벽보 투쟁을 지지한다. 그들의 소박한 투쟁이 또 다른 저항과 투쟁의 씨앗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제 곧 들불처럼 들고 일어날 북한의 주민과 남한의 민주세력이 힘을 모아 김정일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북녘땅에도 민주정부를 수립할 날이 올 것임을 믿는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