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7일 외교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진 ‘미국통’ 김계관을 내세워 대미 메시지를 발신했다. 외무성 고문이라는 직책을 걸고 나온 김계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현명한 선택과 용단에 기대를 걸고 싶다”며 북미 실무협상 재개 분위기 속 미국의 태도 변화를 에둘러 촉구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계관은 이날 담화에서 “최근 미국에서 조미(북미)수뇌(정상)회담 문제가 화제에 오르고 있는 데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조미수뇌상봉들과 회담들은 적대적인 조미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조선반도(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이 깃들도록 하기 위한 조미 두 나라 수뇌들의 정치적 의지를 밝힌 역사적 계기”라고 말했다.
북미정상회담에 의미를 부여하며 운을 띄운 김계관은 “그러나 수뇌회담에서 합의된 문제들을 이행하기 위한 실제적인 움직임이 따라서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하여 앞으로의 수뇌회담 전망은 밝지 못하다”며 “미국은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하여 전혀 해놓은 것이 없으며 오히려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합동군사연습을 재개하고 대조선 제재압박을 한층 더 강화하면서 조미관계를 퇴보시켰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싱가포르 공동성명 이행을 위해 억류했던 미국인들을 돌려보내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전사자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미국에서는 어떤 진전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북미대화 중단의 책임을 미국 측에 돌리면서 태도 변화의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셈이다.
김계관의 이 같은 발언은 실무협상 재개에 앞서 미국에 명확한 입장을 요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그가 한미군사연습과 제재를 직접 거론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향후 이뤄질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체제안전보장과 제재완화를 축으로 하는 미국의 상응조치를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어 김계관은 “아직도 워싱턴 정가에 우리가 먼저 핵을 포기해야 밝은 미래를 얻을 수 있다는 ‘선 핵포기’ 주장이 살아있고 제재가 우리를 대화에 끌어낸 것으로 착각하는 견해가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나는 또 한 차례의 조미수뇌회담이 열린다고 하여 과연 조미관계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겠는가 하는 회의심을 털어버릴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조선(대북) 접근방식을 지켜보는 과정에 그가 전임자들과는 다른 정치적 감각과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로서는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현명한 선택과 용단에 기대를 걸고 싶다”면서 “나와 우리 외무성은 미국의 차후 동향을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9월 하순경 미국과 마주 앉아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북미 실무협상이 이달 내로 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아직 구체적인 일정을 잡지 못하는 등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양상이다.
이와 관련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6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열린 한 기자회견에서 북미 협상의 구체적 계획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우리가 함께 만날 날짜를 아직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는 준비가 돼 있다”며 조속한 실무협상 재개 입장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북미 실무협상 재개 시점은 일단 10월로 넘어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9월 내 실무협상 개최 불발은 비핵화 해법을 둘러싸고 북미 사이에 여전히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편, 이번 대미 담화를 낸 김계관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북측 차석대표, 2000년대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활약한 북한의 대표적인 대미 협상가로 알려져 있다. 현재 북한의 외교수장인 리용호 외무상과 대미협상을 지휘하고 있는 최선희의 선배로, 지난 2016년 사망한 강석주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로부터 이어지는 ‘대미 라인’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6자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했을 당시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마주해 9·19 공동성명(2005)과 2·13 합의 및 10·3 합의(2007)를 이끌어내면서 대외적으로 ‘노련하고도 전략적인 협상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당시 외교위원 명단에서 빠진 동시에 최선희에게 제1부상 자리를 넘겨주면서 사실상 북한 외교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는 관측을 낳았다. 다만 이번 담화를 통해 그가 ‘외무성 고문’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는 것이 확인돼, 여전히 북한 외교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