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기계설계 1인자’ 이철관 박사는 왜 굶어죽었나?

▲ 북한의 기업소

최근 북한의 수해로 식량사정이 나빠졌다는 소식이 다시 들려온다.

10년 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는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었다. 인텔리들이라고 예외가 없었다. 국가의 적지 않은 인재들이 이때 굶어죽었다. 그중에서 남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배’ 한 분이 있다.

용성기계연합총국의 핵심부서인 기계제작연구소 소장 이철관 박사다. 이박사는 이 공장에서 만든 1만톤 프레스의 총설계를 맡았던 북한의 기계설계 분야 1인자였다.

김책공대 기계공학부 출신인 그는 공작기계, 선반, 프레스 등의 설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박사학위를 받은 전형적인 인텔리였다.

용성기계연합총국은 함남 함흥시 용성구역에 있다. 종업원 약 1만명, 공장부지 68.6만㎡(20.7만평), 건평 11.6만㎡(3.5만평)에 달하는 북한의 특급기업소다. 발전설비, 제철·제강설비, 시멘트 설비, 화공설비, 주·단조품과 기타 공작기계 등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이 공장은 일제때 함흥비료공장 분공장으로 설립되어 한국전쟁 중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1957년부터 구소련의 지원으로 1960년 ‘용성기계공장’으로 완공되었다. 당시 용성기계공장은 북한의 공업화에 발맞춰 터닝반과 프레스 제작에서 단연 전국 선두를 달렸다.

1960년 8m 터닝반 제작, 1961년 3천톤급 프레스 제작, 1968년 6천톤급 프레스 제작, 1976년 18m 터닝반과 5천m 대형 시추기 제작 및 1,500㎥ 대형용광로 등을 생산했다. 제2차 7개년 계획기간을 거치며 생산기지가 새로 추가되었고 80년대에 생산기종이 대폭 확대되었다. 공장규모도 커져 연합기업소로 승격되었다.

1984년 5월 18일 이 공장을 찾은 김정일은 1만톤급 프레스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때부터 17개월 만인 1985년 10월 9일 1만톤급 프레스를 완성하여 시운전에서 성공했다. 이철관 박사는 프레스의 총설계를 맡아 6개월 만에 설계를 완성했다. 그 공로로 그는 국기훈장 제1급과 인민설계사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대형 시추기와 대형원심압축기, 대형송풍기 등의 설계를 맡아 잇따라 제작에 성공했다.

귀중한 책 팔아도 한끼 밥도 못먹어

그러나 그 역시 식량난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

함흥은 92년부터 식량공급이 거의 중단됐고 당 기관과 안전·보위기관만 식량을 따로 공급했다.

전형적인 인텔리였던 이박사는 참으로 고지식 했다. 식량배급이 안 돼도 당과 국가가 곧 대책을 마련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배고픔을 참고 견뎠다.

그는 선물로 받은 TV를 비롯하여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다. 그 다음에는 팔 것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평생 그렇게도 아껴 모아온 책들을 장마당에 넘기기 시작했다. 두께가 한뻠씩 되는 귀중한 책을 팔아도 한끼 밥먹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팔린 책들은 장마당 장사꾼들이 휴지로 마구 썼다.

결국 얼마 못가서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졌다. 누구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96년 여름 어느날. 그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몸부림치며 두 눈을 부릅 뜬 채 세상을 등졌다.

그는 밤낮없이 당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조선노동당을 ‘어머니당’으로 곧이곧대로 믿고 4년을 참고 견딘 것이다. 결국 김정일 집단이 이박사를 굶겨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당시 수많은 인텔리들이 이철관 박사처럼 굶어죽어 갔다.

이런 사실을 굶어죽을 일이 없는 남한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강재혁 기자(함흥출신, 2004년 입국) kjh@dailynk.com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