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교육절에 선생님(교원)이 학생에게 평가 받는다

이달 5일은 북한에서 33돐을 맞는 교육절이다.

1977년 9월 5일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제5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를 발표했다.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는 사람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화 하는 것을 교육의 기본 원리로 정하고 당성, 노동계급성을 철저히 구현하고 교육에서 주체를 확립하며 교육과 혁명실천의 결합, 교육 사업에 대한 국가책임 등을 기본원칙으로 정한 북한 사상교육의 지침서로 되었다.

북한은 1977년 9월 19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가 발표된 9월 5일을 교육절로 정하였으며 이 날을 기념해 북한의 교사(이하 교원)들과 학생들은 다양한 행사를 진행 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교육절도 1990년대 중엽을 거쳐 새로운 양상으로 거듭났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전 시기에는 교육절이 되면 학생들에게 휴식을 주고 시, 군 단위로 교직원들만 모여 지구별 대항 체육경기를 조직했다.

교육절을 맞으며 교직원들의 체육 경기는 지역별로 큰 차이 없이 공통적으로 진행된다. 또 시, 군마다 꾸려진 교원상점들에서는 양복이나 화장품세트 같은 물품을 특별 배급 판매했다.

교원상점은 ‘교원들은 조국의 미래를 책임진 직업적인 혁명가들이다’며 이들을 우대해 줄데 대한 김일성의 방침에 따라 꾸려졌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전시기 형식상이라도 진행되던 ‘교원우대’가 김일성 사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북한 교원들은 모든 서민들과 똑같이 ‘고난의 행군’을 거쳤다. 국가 배급에 의지하던 교원들은 배급이 끊기자 권위와 체면을 뒤로하고 세간 살이를 내다 팔고, 장사를 하고, 잘사는 학생 집에 신세를 져가면서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품성이 고지식해 이 마저도 하지 못하는 교원들은 그냥 앉아서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또 이시기에 교직에 회의를 느끼고 교단을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북한 주민들은 1990년대 중엽 이전 교원들에 대해 ‘우물 안 개구리’라 불렀다. 이는 직업상 특성으로 볼 때 교원은 교육이라는 테두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고지식하고 사회 일반인들보다 소극적이고 고리타분하다는 데서 나온 평가다.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하는데 습관이 들어 아무에게나 가르치려 들고 훈시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일반 노동자들에게 ‘잘난척 한다’며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사실 선생들에게 ‘돌아이’라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1990년대 중엽을 거치고 난 교원들은 전과 달라졌다. 생활력도 강해졌고 사회에 대해 보고 평가하고 적응하는 데서도 샌님 같은 스타일을 버렸다. 학생들 또한 교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전과 달리 맹목적인 숭배와 존경심 같은 것이 사라지고 교원의 수준과 능력에 따라 대해주는 현상이 보편화 되고 있다.

교육절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가을철 체육대회와 통합돼 9월 5일에 교육절 경축 삼아 가을철 운동대회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날을 위해 학생들은 학급별로 달리기나 축구, 배구 등 경기종목에 대한 사전 연습을 진행하고 당일에는 저마다 해당 소속 단위가 승리하도록 목청을 다 쏟아가며 응원한다. 이날은 없는 살림이나마 도시락을 준비해온다.

운동회가 시작되기 전 진행되는 ‘식전 행사’가 있다. 요즘 북한에서 전국의 학생들 사이에 멋있는 동작으로 추앙 받는 ‘창격전(일종의 총검술)’ 36가지 동작과 이미 전부터 북한 주민들 속에서 널리 진행되어 오던 ‘태권도 시범동작’이다.

군인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고 ‘나무 총’을 쥐고 군인들처럼 호각에 맞춰 진행되는 창격전은 흡사 군인들의 창격훈련 모습을 방불케 한다.

또 태권도 복장을 입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가요 ‘우리를 보라’에 맞춰 진행하는 ‘태권도’ 동작은 북한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즐기는 인기 종목이다.

‘창격전’과 ‘태권도’가 끝나면 축구나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들과 달리기, 줄 당기기, 장애물 극복경기를 비롯한 체육경기들을 진행한다. 경기는 대체로 오후 2시 정도 끝나는데 시상식을 끝내고 학급별로 모여 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펼쳐놓고 나누어 먹는다.

학생들은 생활이 가장 빈곤한 몇 명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담임교원의 점심을 함께 준비해 오는데 모두 모아 놓으면 큼직한 보따리 두 개정도는 된다.

학교에 비담임 교직원들도 있고 교장을 비롯한 행정 간부들도 있으므로 담임교원은 학급 학생들이 준비한 음식들 중 특이하면서도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골라 교직원들이 따로 모이는 장소에 들고 간다.

이때 학급 학생들이 준비해 온 음식은 담임교원에 대한 소속 학생들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교원들은 들고 가는 음식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이 날을 맞으며 담임교원에 대한 학생들의 인기를 평가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담당교원에게 전달하는 ‘교육절 선물’이다.

90년대 말부터 학생들은 교육절이 되면 담임교원에게 ‘선물’을 주는데 이는 곧 자신들을 가르치기에 수고하는 담임교원에 대한 학생들의 예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교육절이 다가오면 학급의 학부형위원장을 위시한 학부형들과 학생들이 담임교원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할지 미리 토론하고 결정한 뒤 선물을 준비한다.

지금 교원들이 학생에게 인기를 얻으려면 학급 학생들을 모두 잘 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급 학생들 중 ‘코치학생’에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학급에서 ‘코치’는 학생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므로 담임교원은 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만약 담임교원이 이 학생과 사업을 잘못해 ‘인기’를 잃게 되면 담당한 학급에 대한 올바른 교양과 지도통제가 이뤄지기 힘든 것은 물론 담당 학생들에게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교육자는 스스로 교육자라는 의미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2007년 평안남도 순천시 모중학교에 다니던 김모 군(16세)은 어느 날 이유 없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담임교원인 유 씨(여, 25세)는 학급 학생들을 보내 김모 군을 불러 ‘왜 학교에 오지 않았나’ 라고 물었다. 김모 군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자 유 씨는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이때 김모 군은 학교에 오기 싫어서 오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왜 자꾸 따지느냐고 교원에게 맞대들었다. 기가 막힌 유 씨는 김모 군을 교원 사무실로 데리고 가 여러 교원들의 앞에서 김모 군의 행동에 대해 공개했다. 그러자 주변의 교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학생이 그러면 되냐고 충고를 했다.

평소에도 거칠고 주먹이 센 것을 이용해 학급 동료들을 괴롭히던 김모 군은 이에 악심을 먹고 학급에서 자기 말을 무조건 따르는 몇몇 학생들과 함께 며칠 동안 벼르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유 선생이 혼자 밤늦게 퇴근하는 것을 노려 선생을 폭행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 일로 김모 군은 학교와 시당 교육부에서 사상투쟁대상이 되었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지 2년밖에 안된 유 선생은 사회와 자신에 대한 회의심에 싸여 스스로 교단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원들 중 ‘코치’와 사업을 잘 하는 교원은 교육절 날 학급 학생들로부터 양복지 같은 선물이 차례지지만 그렇지 못한 교원들은 화장품 하나 오지 않는다. 이것 또한 90년대 중엽 이전에는 보기 힘든 풍경으로 북한에서 교원들과 학생들간의 새로워진 행태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 이날 학생들의 ‘선물’의 질은 담당학급 학생들의 가정생활 형편과도 많이 좌우된다. 예들면 양강도 혜산시 성후동은 혜산에서도 잘 사는 동네로 소문난 곳이므로 이곳에 사는 학생을 담당한 교원은 양복지선물을 받을 수 있지만 혜산시 혜화동은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여서 혜화동 거주지 학생들을 담당한 교원은 화장셋트 받는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한다.

때문에 자기 살 궁리를 할 줄 아는 교원들은 새 학급을 담당할 때면 학급학생들의 구성상태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며 될수록 잘 사는 집 자식들로 학급 구성을 이루려고 학교 교무부와 사업하기도 한다.

교육절 오전 경기를 진행하고 모여서 점심식사를 끝낸 교직원, 학생들은 시, 군이나 학교내 꾸려진 계급교양관이나 반 간첩투쟁전람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교육절 날의 일과를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