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공군 창설 주역 리활은 일본 조종사 출신

▲신의주항공대학생들과 리활, 가운데가 김일성이고 오른쪽이 리활이다.

조선중앙통신이 3일 사망사실을 발표한 리활은 북한 공군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국해방전쟁(6.25전쟁)기념관’ 공로해설원이었던 리활중장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시하고 빈소에 화환을 보냈다고 전했다.

평안북도 염주가 고향인 리활은 일본 나고야 항공병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시간 2천 시간을 넘긴 일본 공군 에이스 중에 한 사람이다.

북한 전문가 중 상당수는 이활이 북한 공군 창군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커 그의 태평양 전쟁 참전 경력을 민간 항공기 근무 경력으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실제 영화 리활을 모델로 만든 북한 영화 ‘붉은 날개’는 이러한 분석에 설득력을 높여 준다.

영화는 조국을 잃은 식민지 청년이 일본에서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우수한 비행사가 된 내용으로 시작한다. 우수한 조종사가 되고도 일본군의 가미가제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한 청년은 김일성의 새로운 조국을 만나면서 조국의 귀중함을 알고, 그 조국을 위해 비행기와 함께 자폭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 공군 산파 역할 톡톡히

북한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 리활이 일본군 출신 조선인 조종사들을 규합하여 일제가 건설해 놓은 신의주비행장과 전투기의 파괴를 막는데 높은 공로를 세웠다고 평가 하고 있다.

리활은 북한공군의 모체가 된 신의주항공대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 조종사로 복무했던 20여명의 후배 조종사들과 함께 북한공군 창설을 주도했다.

이들 중에는 후일 한국전쟁 중 공군 기술부사단장을 지낸 강치우, 김기옥(공군제1연대장), 김한욱(공군제2연대장)등도 있다. 이들 모두 일본군 조종사로 있던 사람들이었다.

리활은 항공대 제1고문관이었던 소련공군 마이오리 맥심소좌(소령)와 함께 북한공군의 산파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일본 95식 고급연습기를 수리하여 청진, 정주, 평양, 신의주로 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항공대 신입생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쳤다.

북한은 48년 10월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넘겨받은 IL-10, Yak-9 전투기와 49년 김일성의 소련방문으로 받아오는 전투기로 비행사단을 창설한다. 초대 비행사단장에는 왕연, 부사단장에는 리활을 임명한다. 왕연은 소련군이 추천한 사람이다.

리활은 6.25전쟁시기에는 항공사단장과 공군부사령관으로 활약하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군사령관으로 승진하고 ‘공화국영웅’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북한이 리활과 그 외 20여명의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을 숙청하지 않고 북한공군에 받아들여 사실상 그들로 북한공군을 창건 했다는 것이다.

리활은 북한이 친일파를 완벽히 청산했다는 주장을 반증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북한은 창군 당시 육군은 전투 경험이 미천해도 큰 무리 없이 빨치산들을 요직에 임명할 수 있었지만, 공군은 기술력 없이는 간부 등용이 불가능 한 특성 때문에 리활 등 일본군과 민간 출신 비행사들을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육군과 해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공군의 인력을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과 기술자들로 충당한 것이다. 김일성은 조선항공협회를 조직하면서 자기가 직접 명예회장으로 나설 정도로 공군창설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리활도 한때는 출신성분에 걸려 공군사령관에서 함경남도 함흥시에 있는 가담전기기계공장 노동자로 10여 년 넘게 좌천되기도 했다.

후일 김일성은 “리활이가 ‘종파분자’들의 모함으로 그렇게 되었다”며 리활이를 다시 평양으로 불러 데려갔다. 벗었던 군복도 다시 입히고 계급도 인민군중장(소장)으로 임명하여 조국해방전쟁기념관 강사로 일하게 했다.

한편 북한은 리활이 남조선에서 공군사령관을 줄 테니까 오라고 꼬드겨도 가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붉은 날개’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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