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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권력 핵심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능적인 거짓말쟁이’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영양가 없는 훈수꾼’으로 평가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는 ‘그는 학자(아마추어)’라고 표현한다.”(‘나는 통일 정치쇼의 들러리였다’ 中)
지난달 20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를 조속히 달성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자 평화체제 논의가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대선정국을 뒤흔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범여권 정치인들은 정국 반전 카드로 남북정상회담 조기 개최를 거푸 언급하며 북풍(北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정상회담과 대선이 정치적 함수관계로 물고 물리는 가운데 지난 4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 씨의 대북 비밀접촉을 기획한 주인공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북한전문가 권오홍 씨가 그 비망록을 책으로 냈다.
당시 평양과 베이징, 단둥에서 수시로 북측 인사들을 만나며 서울과 평양을 잇는 다리역할을 한 저자는 스스로를 『나는 통일 정치쇼의 들러리였다』(동아일보사刊)고 말한다.
책은 여권 인사들의 잇따른 대북접촉을 ‘분단을 먹고사는 통일 장사꾼들의 정치이벤트’로 평가하고,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북풍이 남북관계를 뒤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정치적 화장질’로는 남북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 ‘서로의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현안과 물자를 주고받는 행위’를 중단하고 상생 가능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남북경협 프로젝트를 기본으로 대화의 폭을 넓혀가는 것.
책은 이같은 저자의 입장을 바탕으로,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노무현 정권에 몸담은 권력 실세들의 대북접촉 과정에서 벌어진 비화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들은 또 대북 직접 송전을 제안했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제안에 실현가능성을 의심했다고 한다.
특히 저자는 북한 핵심부가 ‘노무현에게 4년동안 당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제대로 하자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지 않는 사람’(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앉히고, ‘미국 싫어한다고 하더니 이젠 미국 앞에서 긴다’는 것이다. “평양 핵심부는 노무현식 대북접근에 대해 종잡을 수 없어한다”는 표현이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북한 고위층이 한나라당의 차기 집권을 막을 카드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쌀차관을 빨리 제공하는 문제조차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에 사실상 용도 폐기했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시각변화도 엿볼 수 있다. 책에 따르면 북한은 한나라당과도 ‘찐하게’ 대화하고 싶어한다. 한나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 때문이다. 최근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이 ‘포용’ 쪽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대목이다.
이러한 기술들이 상당부분 저자의 주관적 판단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해도, 북측이 남한의 정치권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저자는 지난해 9월 북측이 자신을 통해 ‘대화하자’고 제안한 후 현 정권에 정상회담 개최에 ‘이용당했다’며 억울함을 드러낸다. 또 북한은 비선라인을 통한 정상회담으로 경제 실리주의를 추진하고자했던 의도가 있었으나, 현실적 이익에 눈 먼 남한 정치인들의 개입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렸다고 평가한다.
북한이 과연 이를 통해 경제적 실리만을 추진하고자 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현 정치권이 ‘정상회담’이라는 허울과 정치적 이득에만 관심을 두고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이미 우리는 남북정상회담이나 평화체제 구축같은 카드로 ‘신(新)북풍’을 일으켜 대선 승리의 깃발을 꽂아보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신물이 나 있다. 게다가 도깨비방망이 두들기듯 북한에 이에 대한 거침없는 요구를 해보지만, 북한에서도 더 이상 ‘선물’을 쉽게 내놓을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과연 이번 대선에서도 ‘통일 정치쇼’가 등장할지 의문이지만, 그 쇼가 실현된다 해도 국민들은 더이상 그 쇼의 ‘들러리’가 되고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맹점인 듯하다.
최옥화 / 대학생 웹진 바이트(www.i-bait.com)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