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타결> 北 경수로 지원받을 길 터놔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참가국들이 향후 경수로 제공을 논의한다는 원칙에 극적 합의함으로써 북한이 숙원이었던 경수로를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회담 당사국은 19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다른 참가국들은 이에 대해 존중을 표시하고 적당한 시점에서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핵폐기에 대한 상응 조치로 경수로 도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됐으며 만성적인 에너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셈이다.

북한과 경수로의 인연은 제2차 북핵문제가 불거진 직후인 2003년 1월21일 조선중앙통신이 85년 핵무기비확산조약(NPT) 가입 이후부터 94년 10월 제네바 합의 당시까지의 경과를 정리한 상보(詳報)에 잘 정리돼있다.

상보는 북한이 74년 평화적 핵에너지 개발을 위해 원자력법을 채택한 이후 캐나다, 스웨덴, 프랑스 등에 경수로 도입을 타진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대공산권수출통제기구(COCOM)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소련으로 눈을 돌려 경수로 도입을 타진한 끝에 85년 12월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직후 NPT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89년 구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에 이은 소련의 해체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북.소 양국이 경수로 부지로 점찍어 놓은 곳이 현재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공사현장이 위치한 함경남도 신포의 금호지구였다.

이후 경수로 도입문제는 한동안 물밑에 잠복해있다 영변 5㎿급 실험용 원자로(흑연감속로)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문제로 제1차 북핵위기가 불거졌던 93년 7월23일 북한의 외무성 대변인의 입을 통해 다시 제기됐다.

대변인은 당시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회견을 통해 `민간용 에너지 전력생산을 위해 경수로의 도입을 미국측에 제안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이는 핵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는 우리의 최대한의 의지”라고 밝혔다.

결국 이때 만들어진 `핵포기=경수로’라는 북한의 입장이 현재 6자회담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경수로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외 정세 변화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북한의 숙원이었던 셈이다.

마침내 북한은 제1차 북핵위기 당시 전세계를 가슴 졸이게 만들었던 NPT 탈퇴와 핵연료봉 인출 등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며 미국을 압박한 끝에 제네바 합의를 통해 경수로라는 `전리품’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경수로 프로젝트는 비용 분담 및 노형 선정 문제로 출발부터 진통을 겪다 간신히 첫삽을 뜨는 데는 성공했지만 2001년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 행정부가 이듬해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계획을 주장, 북한이 NPT 탈퇴 및 핵연료봉 인출로 맞서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공사 계속 여부를 놓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2003년 8월 사실상 중단됐다.

13개월만에 재개된 제4차 6자회담 역시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전격 복귀를 선언했지만 1단계 회담 막바지에서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 권리를 둘러싼 북.미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휴회하고 말았다.

2단계 4차회담의 재개를 앞두고서도 북한은 지난 6일 노동신문의 기명 논평을 통해 “우리 인민이 수십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건설한 자립적 핵동력공업을 우리가 핵에네르기로 보상되는 대안도 없이 외부의 강요에 의해 송두리째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며 또한번 경수로에 대한 집착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여기서 북한이 언급한 `핵에네르기로 보상되는 대안’은 지난 15일 현학봉 북한 6자회담 대변인의 입을 통해 (북.미 간) 신뢰조성의 기본 조건으로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해달라는 말로 구체화됐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핵무기 전용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킬 카드로 경수로 운영을 공동관리에 맡기고 사찰도 받겠다고 천명, 미국을 압박했으며 결국 ‘적당한 시점’이라는 조건을 달아 경수로의 불씨를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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