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결정권 공백으로 핵협상 `정체’ 불가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북한의 체제 특성상 ‘결정의 공백’으로 인해 핵협상과 대미 및 남북관계 등 대외관계 움직임이 ‘올스톱’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북한의 정책결정 시스템은 이른바 ‘수령’ 중심의 유일결정체계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와병 후 북한의 대외정책은 당분간 ‘현상유지’ 기조를 띨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김 위원장의 정책 결정이 부재한 상황이지만 인물 중심으로 운영되는 북한의 시스템상 그를 보좌해온 국방위원회가 김 위원장의 역할을 대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북한 지도부는 오히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유지.관리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경우 북한은 미국과 벌이고 있는 핵검증 협상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불시사찰, 시료채취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역시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가 부시 행정부가 과감한 대북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핵협상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그에 따라 북미관계도 정체국면을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6자회담의 10.3합의를 깨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요구하는 검증 프로그램을 쉽게 받지는 않을 것”이라며 “6자회담에서는 자신들의 원칙을 고수하며 합의를 지연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중국도 현 상황에선 검증문제에 대해 북한을 설득.압박하는 등의 방식으로 북미간 핵협상을 중재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핵문제가 고비에 처할 때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특사 등을 파견해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설득하고 북한을 협상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왔지만, 결정권을 가진 설득 대상이 부재하는 셈이다.

당초엔 중국이 북한의 9.9절 행사에 고위급 경축 특사를 보내는 김에 핵협상의 중재역할도 맡기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그 특사를 맞을 김 위원장이 와병함으로써 경축사절도 보내지 못했다.

북일관계 역시 납치 문제 등 양자간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분간 진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북한이 최근 일본과 합의했던 납치문제재조사위원회의 구성 등을 미룬다고 일본측에 통보한 것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의 사퇴 등 일본 정국을 이유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북한의 내부정세 변화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은 관계복원을 결심할 결정권의 공백으로 남북관계 개선 기회도 늦추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최근 정부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긍정적.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대북 지원단체의 방북 허용에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남북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급격하게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거나 위기를 조장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결정하지도 못하는 국면”이라며 “당분간 이러한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핵문제를 카드로 미국과 협상 태도를 취해온 김정일 위원장이 와병함으로써 군부를 중심으로 대외정책이 강경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최근 북미간 영변 핵시설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다가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핵시설의 복구 움직임까지 보이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조치를 이행하지 않고 북한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검증기준을 요구하는 데 따른 북한 특유의 반발 방식이라는 풀이가 더 일반적이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