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결단’ 과시, 대미관계 전환에 초점

북한이 방북했던 미국 국무부 성 김 한국과장에게 상당한 분량의 영변 핵시설 가동기록을 넘김으로써 핵폐기 2단계 조치 완료를 위한 가시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는 단기적으론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를 기대한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내년 등장할 차기 미 행정부와의 협상 인프라 구축용이라는 의미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작업과 더불어 북한이 그 가동기록을 제출한 것은, 북핵 폐기 과정을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합의가 이행됐던 수준 이상으로 진행시킨 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제네바 합의 때 북한 핵시설의 가동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북한이 가동기록 등을 제공하는 신고와 검증은 경수로의 핵심부품이 들어가고 난 이후로 상정돼 있었다.

북한이 핵시설 가동기록을 넘겨줬다는 것은 검증과 폐기를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영변 핵시설의 폐기 의지도 분명히 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2.13합의’ 등에서 북한의 핵신고와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의 해제를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취하기로 했음에도, 이번에 북한이 핵시설 가동기록을 넘긴 것은 그만큼 적극성과 능동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다.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당면해선 테러지원국 해제 등 미국의 정치적 보상 조치를 확실히 이끌어 내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핵신고의 걸림돌이었던 농축우라늄프로그램(UEP) 문제와 시리아와의 핵협력 문제에서 미국이 ‘간접시인’ 방식으로 북한의 부담을 덜어준 성의와 협상 의지를 북한이 긍정 평가하고 그동안 정치적 멍에였던 테러지원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2.13합의 때도 미국이 북핵 6자회담을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뜨렸던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방준비은행(FRB)까지 동원하는 적극성을 보여준 것에 신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김성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은 금융제재 등을 겪으면서 테러지원국 해제와 북미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라며 “따라서 미국의 완화된 대북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위기를 먼저 조성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북한은 미국과 협의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해 의회를 설득하려면 우리가 신고서에 어떤 내용을 더 담아야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능동성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최근 보이는 적극적인 대미 행보는 장기적으론 미국에서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북미관계 개선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내년초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감안, 부시 행정부의 협상 의지를 믿고 북미관계 개선의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관계를 한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것이다.

북한도 미국의 대선 일정을 감안한 이른바 ‘8월 시한론’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는 남한의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임기말의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응해 ‘10.4선언’을 만들어낸 것과 마찬가지 구도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북한 입장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내에 핵문제와 북미관계를 일정한 궤도에 올려놓음으로써, 차기 행정부와도 현재의 협상 분위기를 이어가고자 할 것”이라며 “2001년과 같은 상황을 재연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0년 북한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와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는 등 북미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물거품이 됐었다.

그러나 이번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대북정책을 구사해온 부시 행정부와 북미관계의 미래비전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차기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기초를 닦으려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북한이 북미관계 개선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뉴욕 필하모닉을 평양으로 초청해 미국 애국가를 연주토록 했던 것을 넘어서는 과감한 외교적 행보를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미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된 냉각탑 폭파와 같은 상징적 조치들을 취해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2.13합의’ 직후인 3월 중순께 이미, 북한이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의지를 평가하고 그에 따른 북한 나름의 상응조치의 일환으로 영변 핵시설의 폭파를 국제사회에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북한 내부소식통의 전언이 있었다.

일각의 전망대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이 성사되면,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입을 통해 비핵화 의지를 거듭 천명하고 북미관계 개선의 열망을 솔직히 표명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낙인찍힌 ‘깡패국가’ 이미지를 벗는 동시에 부시 행정부에 대해선 더욱 과감한 대북접근을 가능케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9일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영도 과정에 핵억제력을 갖추었지만” ‘선군’이 곧 핵무장화는 아니므로 “미국이 극적으로 움직이면 틀림없이 조선(북한)도 극적인 대응을 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김연철 연구교수는 “북한이 영변 가동기록을 제공했기때문에 6자회담이 개최되면 2단계 조치는 대략 마무리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이라며 “이제 신고 내용의 검증 작업과 동시에 핵폐기를 위한 3단계 논의에 들어서는 만큼, 북미 양측이 적극성을 가지고 회담에 임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에서 3단계 로드맵 정도는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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