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美에 핵.관계개선 ‘성의’ 표시

북한 당국이 미 국무부의 성 김 한국과장을 단장으로 한 미국의 ‘불능화 기술팀’이 판문점을 통해 방북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미 정부 관계자가 그동안 판문점을 거쳐 북한에 간 경우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흔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부시 행정부 들어선, 2002년 10월 대통령 특사로 지명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방북 일정을 준비하기 위한 미국 실무진이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이래 판문점을 경유한 입북은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의 불능화 기술팀의 판문점 경유를 허용한 것은 북미관계 개선과 핵문제 진전을 고려한 북한측의 대미 ‘성의’ 표시로 풀이된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9일 “북한 당국이 점차 가속화되는 북미 관계정상화 움직임 속에서 국제사회를 향해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를 알리기 위해 불능화 기술팀에게 판문점 경유를 허용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불능화 기술팀의 방북 자체가 북한측의 초청으로 이뤄진 점도 주목된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불능화 기술팀의 방북 사실을 발표하면서, 기술팀의 방북은 선양에서 열린 6자회담 비핵화실무그룹회의 때 북측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북측이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가 진지함을 입증하기 위한 제스처인 셈이다. 힐 차관보는 불능화 기술팀의 방북 의미에 대한 질문에 “북한을 포함해 모든 당사자들이 핵문제의 결실을 봐야 한다는 목적의 진지성의 표시”라고 말했다.

과거 미국측 인사로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한 사례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토머스 허바드 전 주한 미국대사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6월 북핵 위기 해결사로 판문점을 거쳐 입북, 김일성 당시 주석과 면담해 위기를 종식시키고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허바드 전 대사는 같은해 12월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로서 미군 헬리콥터가 비무장지대 북측에 추락했을 때와 2000년 10월 역시 부차관보로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 해 각각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었다.

북측은 자신들이 미국과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극히 제한해 판문점을 개방한 것이다.

지난 4월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와 빅터 차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입북할 때는 베이징(北京)을 경유했다가 귀로에 판문점을 넘어 서울로 온 적도 있다.

이 역시 한국전 때 숨진 미군유해의 운구를 위한 것으로, 북측은 미군유해의 송환을 대미 성의표시로 활용했다.

그러나 비핵 평화단체인 ‘퍼그워시회의’ 창설자인 조셉 로트블랫 박사가 2001년 4월 판문점을 거쳐 방북하려다 북측의 거절로 베이징을 경유해야 했고, 독일.조선 의원친선협회 대표단은 2004년 6월 방북했다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오려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북한은 판문점에 대해 ‘유엔의 모자를 쓰고 있는 미군 관할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8월 방북한 남측 언론사 사장단과 가진 오찬에서 “50년대 산물인 판문점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밝힐 정도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미관계 개선을 의식한 북한의 ‘성의’ 표시의 또다른 사례는 8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이 신문은 ‘북, 협력 신호를 보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최근 수주간 북미 접촉들에서 양국간 “점차 건설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핵문제에서 뿐 아니라 위조와 비재래식 무기 수출 등 북한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불법활동들을 막는 노력에서도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북한 정부 관계자들이 힐 차관보와 면담에서 불법활동 혐의자들을 많이 체포했으며, 국제금융계의 신뢰를 얻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

미국은 방코 델타 아시아(BDA)를 통한 대북 금융제재 문제가 북미간 핵심쟁점으로 부각됐을 때 금융제재 해제의 조건으로 북한측에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면서 100달러짜리 위조지폐인 슈퍼노트의 동판도 넘길 것을 제시했었다.

힐 차관보도 북측의 범법자 처벌 통보에 신뢰구축의 한 방법으로 위폐 제작에 사용된 모든 장비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국제사회의 시선이 핵문제로 쏠린 가운데 북미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 등을 통해 북한과 미국은 핵문제 뿐 아니라 그동안 북미관계정상화에 장애물이라고 미국측이 제기해온 문제들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하고 있으며, 북측이 미국에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따라 북한의 인권문제와 ‘비재래식’ 무기인 미사일 수출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과 미국간 대화가 시작됐을 것으로 관측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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