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핵 검증 관련한 평양협상에서 진전이 있을 경우 이달 내 대북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북한에 제시한 것으로 관측되면서 북핵문제도 새로운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결과를 일본에 설명하면서 북핵 검증체계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이뤄질 경우 이달 중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할 방침이라는 내용을 통보했다고 교도(共同)통신이 9일 보도했다.
이르면 10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할 가능성도 있다는 폭스뉴스의 관측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힐 차관보의 방북 협상에서 미·북은 쟁점이던 검증 방안에 대해 최대한 유연성을 발휘, 의견차를 줄인 것으로 관측된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지난 7일 국감에서 “(미국은 물론) 북한도 유연성을 발휘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 부시 대통령의 최종 승인이 이뤄지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삭제 조치에 착수하고 북한은 지난 8월 말부터 재가동 의사를 밝혀 온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재개하게 된다.
아직 힐 차관보의 방북협상에 따른 미·북간 검증체계 합의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른바 ‘분리 검증안’이 유력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분리 검증안은 북한이 지난 7월 중국에 제출한 정식 신고서에 담긴 영변 핵 시설을 먼저 검증한 뒤, 미·북 간 비공개의사록에 담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및 핵확산 문제는 추후 검증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지난 4월 싱가포르 미·북 회담에서 미국이 당장의 위협요소인 40kg 안팎의 플루토늄과 영변의 핵시설에 대한 불능화에 집중하겠다는 현실적 타협안을 제시, ‘분리신고’에 합의하면서 이미 예견된 수순으로 관측됐다.
이에 따라 UEP·핵확산 문제는 다음 단계에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이번 협상에서 검증 원칙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정부분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내세웠던 핵심 원칙은 ‘미신고 시설 방문’과 ‘제한 없는 시료채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북한은 미국의 ‘미신고 시설 방문’에 대한 추가 보상조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같은 핵 검증 합의를 미국과 북한이 공식 발표하면, ▲테러지원국 삭제 조치 발효 ▲북한의 핵 불능화 작업 재개 ▲미·북 협의에 따른 6자회담 재개 등의 수순이 시작될 전망이다. 7월 6자회담 직후로 되돌리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 힐 협상안은 부시 대통령의 최종 승인 단계가 남아있다. “임기 말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 성과에 집착해 북한에 지나친 양보를 한다”는 미국 내 강경기류는 여전하다. 또 대선정국이 한창인 시점에 행정적 재량권의 한계도 분명하다.
더불어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 후 북핵 검증체계 구축 협상을 벌여온 미 부시 행정부가 국내 강경파들의 반발에 따라 ‘국제적 기준에 맞는 검증’과 UEP·핵확산 문제에 대한 검증을 요구하면서 대북 테러지원국 삭제까지 미뤄왔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관측대로라면 미국의 일방적인 양보로 보여져 또다시 미국 내 반발이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존 볼턴 전(前) 유엔대사도 9일 RFA와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가 영변 플루토늄에 국한한 검증합의를 대가로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풀어준다면 커다란 실수이자 치욕스런 일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북한이 최근 미사일 실험발사, 한국에 서해상 무력충돌 경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위협’하고 있어 관련국들의 반발도 예상돼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부시 행정부도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9일 “앞으로 며칠간 (북한 상황을) 지켜보자”며 대북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에 대해서도 “무언가 알릴게 있으면 그 때 알려주겠다”고만 말했다.
숀 매코맥 대변인도 “북한은 지난 한달 넘게 한반도 비핵화 과정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고 부정적인 조치를 취해왔지만, 그런 모든 조치는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도 자국 납치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일본 수석대표인 사이키 아키타카(齊木昭隆)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지난 8일 성 김 미국 대북특사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KIDA) 국방현안연구위원장은 이번 미북협상에서 ‘분리 검증안’이 유력하게 제시된 것과 관련, “검증과 관련한 북한의 ‘아젠다 쪼개기’ 협상 전술에 미국이 끌려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임기 말 부시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따라 ‘검증체계’에 대해 북한이 요구하는 방향대로 쪼개서 협상해주고 검증·폐기 3단계로의 진입하려고 하는 것 같다”며 “강경파의 반발이 있더라도 조만간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검증 원칙에서 미북 간 이견이 있었지만 미국이 제시한 원칙을 북한이 받아들이면 분리검증을 미국이 수용할 것”이라며 “결국 미국과 북한은 서로 ‘장군’과 ‘멍군’을 부른 셈”이라고 부연했다.
다만 그는 6자회담 재개와 관련, “6자회담은 이미 미·북 양자회담의 들러리가 된 상황”이라며 “추후 회담 재개도 미국과 북한의 합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