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석 국회부의장,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남경필 전 국회외교통일위원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정병국 의원(전 문화관광부 장관), 김을동 의원, 정문헌 의원.
6월 19일 각계 인사 66명이 발표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민통합선언문’에 서명한 새누리당 전·현직 의원들이다. 이른바 ‘진보와 보수’를 아우른 참여자 가운데 굳이 새누리당 인사만을 거론한 것은 선언문 6개항 중 1개 조항 때문이다. 그 조항과 관련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했는지를 묻기 위해서이다. 집권여당의 인사들이 정부 입장과 전혀 다른 내용을 왜 지지했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과연 소신인가 아니면 인기영합인가. 부주의한 실수인가, 무지의 결과인가.
선언문의 둘째 조항은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빠른 시일 내에 종전을 위한 협상을 개시하여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도록 한다’이다. 이 조항이 강조하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남한과 북한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부분이다. 유엔과 북한, 중국이 맺은 1953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문제는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지금까지 남한 내 국론분열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북한은 1950, 60년대 ‘주한미군 철수’와 ‘북남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70, 80년대는 ‘북-미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2000년대 이후는 평화협정 체제 수립이 북핵 문제의 선결과제라고 주장한다.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미국과 수교가 되면 핵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선(先) 평화협정 체결, 후(後) 핵 포기이다. 북한 정부는 2010년, 성명을 통해 미국에 평화협정을 제안하면서 미국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경우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선호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이달 21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국방부는 “남북은 1992년 기본합의서에서 평화 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했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문제는 실질적 평화 상태가 이뤄지는 단계에서 검토가 가능하다”고 밝혀왔다. 핵 문제 해결과 군사적 신뢰 구축 등이 평화협정 전환의 선행조건이라는 것. 2010년 유명환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은 북한이 핵무기 포기를 고려하기 전에 미국에 평화협정 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협상 요구는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겠다거나 핵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 전술일 뿐”이라고 말했다. 2011년 12월 평양을 방문했던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통령 특사는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 중대한 진전이 있을 때 미국은 평화협정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방침도 선(先) 핵 포기, 후(後) 평화협정 논의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바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논의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누가 평화를 마다할 것인가. 그러나 평화로 가는 과정에 대한 남북한 정부의 생각과 방향은 이처럼 전혀 다르다.
이번 선언문의 6개 기본원칙은 ‘통일을 남북 관계의 기본축으로 삼자’는 일반론에 이어 구체적 실천의 첫 번째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을 들었다. 남북이 빨리 논의를 시작해 체제를 전환시키라는 것이다. 바로 선언문의 핵심이요 방점이다. 선언문은 다른 원칙에서 북한에 핵무기 개발 중단 선언과 주민들의 인권 개선 등도 요구했다. 그러니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은 한국과 미국이 내건 핵 포기라는 전제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이 핵 포기라는 한국과 미국의 방침을 감안하면 이 원칙은 북한의 선(先)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선언문에 서명한, 여당 중진 인사들에게 북한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그들의 소신이냐고 묻고 싶다. 누구든 이념의 자유를 가진다. 의원도 예외가 아니다. 선언문에 서명한 다른 인사들도 그들의 이념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 인사라면 그들의 정부처럼 북한의 핵 포기가 없는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굳이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와 이유가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안보정책은 경제나 복지정책보다 훨씬 더 이념적이다.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은 정당의 존재 이유이다. 정부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의원이라면 그 정부를 만든 당을 떠나든가, 아니면 정권 창출에 동참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궁극으로 노리는 것은, 유엔사령부가 해체되면 주둔 명분이 약화될 주한미군의 철수이다. 그러면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대한민국을 적화할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은 믿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그들이 소신에 따라 선(先) 평화협정 체결 주장에 서명했다면 새누리당은 물론이고 이 정부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소신은 그렇지 않은데 서명했다면 시류에 영합해 인기를 얻기 위해서인가. 많은 정치인이 어설프게 중도를 표방한다. 무늬만이라도 진보를 내걸고 북한에 우호적 태도를 보여야 젊은이들의 표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언문에 서명했다면 국가안보를 외면한 위험한 발상이다. 공교롭게도 남경필·정병국 의원과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차기 경기지사 후보로 꼽힌다. 선언문 발표를 주도한 평화재단 이사장은 법륜 스님이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당시 교수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널리 알려진, 새누리당과는 다른 이념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서 텔레비전 연예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정치노선과 이념이 다른 그의 인기를 활용하고, 이념적 물타기를 하기 위해 서명을 했는가. 그렇다면 유치한 발상이다. 아니면 그들이 직접 꼼꼼히 읽지 않은 채 좋은 뜻을 가진 선언문이라는 생각만을 해 비서들이 권유하는 대로 서명했을 수도 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북한의 평화협정 전환 주장의 정확한 내용과 의도를 잘 모르고 서명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이든 새누리당 중진 의원들의 서명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나라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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