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中동북공정 강력 비판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국이며 당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주권국가였다.”

북한의 역사학자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면 논박했다.

26일 입수된 북한의 계간 ‘력사과학'(2007.2호)에 따르면 리광희 박사는 ‘고구려의 왕호에 대한 몇 가지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고구려 군주의 칭호인 왕이라는 표현이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징표의 하나”라며 고구려의 왕은 중국 황제의 제후라는 주장을 논파했다.

김일성종합대학 부학부장인 리 박사는 지난해 11월15일 고구려의 평양 천도 1천580돌을 기념한 사회과학부문 연구토론회에서 ‘고구려의 남방진출 과정과 평양 천도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리 박사는 ‘력사과학’지 논문에서 “일부 다른 나라의 학계에서는 고구려에서 나라의 최고통치자를 왕으로 표현한 것을 가지고 그것이 고구려의 군주가 중국의 황제 밑에 배속된 제후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며 ‘광개토대왕릉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자치통감’, ‘수서’, ‘위서’ 등 각종 사료에 기초해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을 ‘정조준’했다.

그는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릉비나 중원고구려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굳이 자기의 군주를 왕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 중국의 정치체계나 문화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독자적인 정치문화, 정치체계를 가졌던 고구려는 전성기에도 군주를 황제가 아닌, 왕으로 칭했다고 말했다.

고구려가 5호16국(304~439)처럼 중국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같은 관점”을 가졌다면 최강성기를 누린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겠지만 끝내 왕이라는 칭호를 고집했다는 설명이다.

리 박사는 특히 “고구려가 자기의 군주를 왕이라고 하였다 하여 그것을 당시 중국의 정치체계에 맞춰 보려고 중국 황제의 밑에 있던 제후라고 규정하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지난날 동아시아에 존재한 모든 나라들을 덮어놓고 중국의 틀에 맞춰보려는 선입견적인 태도에서 출발한 비과학적인 ‘이론’이라고 밖에 달리 볼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고구려에서 마지막까지 자기의 군주를 왕이라고 한 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중국의 정치와 문화와 별개로 된 자기의 국가체계를 마지막까지 고수했음을 보여주는 생동한 실례”라며 “고구려에서 여러 가지 왕호를 제정해 쓴 것도 당시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다른 측면”이라고 강조했다.

이름 뒤에 왕(王)자를 붙여서 제정한 왕호는 고조선 말기부터 쓴 것으로,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 썼지만 중국 역사에서는 이런 형식의 왕호가 은(殷)나라까지 사용되고 없어졌다고 리 박사는 설명하고 “연호와 관련된 왕호, 장지명과 관련된 왕호도 당시 중국에서는 그 어느 나라들에서도 사용되지 않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왕호였다”고 지적했다.

또 중국은 왕의 공적이나 생애의 특징을 한 글자로 규정한 반면 고구려에서는 그 내용을 우리 말로 길게 풀어서 왕명으로 만든 점도 중국 학계의 주장에 대한 반대 논거로 제시됐다.

리 박사는 “같은 왕호라고 해도 뜻만 같고 글자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당시 한자 그 자체보다 내용을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 실례로, 광개토왕릉에 나오는 ‘광(廣)개토경’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모두루묘지명에서는 ‘대(大)개토지’로 표현된 점을 들었다.

리 박사는 “고구려에서는 당시 중국의 봉건국가들에서 왕호를 줘도 그것을 인정하지도, 쓰지도 않았다”면서 “총체적으로 보면 고구려왕의 왕호는 앞선 시기 존재했던 동족의 나라 고조선의 왕호를 계승해 자기의 특성에 맞게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같은 시기 존재한 중국의 최고 통치자들에 대한 칭호와 명백히 구별되며 그에 제약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북한은 지난해 대중역사서 성격의 ‘고구려 이야기’를 펴내고 “고구려 역사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어제도 그렇고 오늘에 와서도 자못 중요하다. 우리는 앞으로 고구려를 더 잘, 더 정확히 알기 위해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다”라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우회 비판했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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