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1.30일 구권과 신권을 100 대 1로 교환하는 화폐교환조치(리디노미네이션)를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북한 당국은 사실상 비상조치에 가까운 경제조치를 취하고서도 관련 내용을 공표하지 않아 조치의 내용과 의도가 무엇인가를 두고 여러 설이 분분하다.
11.30 조치의 전모가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또한 진행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화폐교환조치의 전체적인 상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글은 11.30 조치의 전체적인 상에 접근하기 위한 예비적인 검토의 차원에서 몇 가지 논점에 대한 정리를 시도한 것이다.
북한의 화폐교환조치와 관련된 논의에서 흥미 있는 것은 이번 조치가 베트남의 1985년 화폐개혁 조치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베트남의 1985년 조치를 개혁개방에 저항하는 통제파의 주도에 의한 조치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북한의 이번 조치는 베트남식의 개혁개방으로 가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시장을 억압하고 통제경제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가기 위한 전단계로 이번 조치를 위치지우는 입장이다. 후자는 이번 조치에도 불구하고 초 인플레를 진정시키지 못할 경우 북한의 선택지는 결국 베트남 모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자는 시각차이가 있지만 이번 조치가 ▲ 통제경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인가 아닌가 ▲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물가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방책을 포함하고 있는가 ▲ 또 다시 초 인플레이션에 휩싸일 경우 북한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하는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1.30 화폐교환조치의 주요 내용
베트남의 1985년 조치는 교환비율 10:1로서 북한보다는 다소 온건한 화폐개혁조치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화폐개혁 조치는 가격, 임금 개혁조치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에서 가격, 임금에 손을 댔지만 화폐개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북한은 처음부터 화폐개혁조치를 실시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2002년이라는 숫자가 인쇄된 신권이 이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북한이 베트남의 1985년 조치를 모방하면서도 화페개혁 조치를 뒤로 미루었던 것은 베트남사례의 부정적인 교훈이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한 연구자에 의하면 가격 임금체계의 개변과 화폐개혁을 동시에 실시한 것이 혼란을 부채질하였다.
북한은 아마도 이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 실시 기회를 엿보다가 이번에 전격적으로 화폐교환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북한의 11.30 조치와 베트남의 1985년 조치의 비교
그런데 여기서 베트남과 북한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베트남은 1985년 조치 이후 초 인플레가 진정되지 않았다. 1986년의 물가상승률은 전년에 비해 487.3%였다. 초인플레가 지속되었다.
초 인플레가 지속된 원인은 생산과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베트남 당국은 같은 해 12월에 도이모이 조치를 취하게 된다. 도이모이 정책은 사적경제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에 중점이 있었고 이를 통해 생산과 공급의 확대를 기한 것이다.
도이모이 정책으로 물가는 수년 후 안정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개혁개방이 본격화된다.
그러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7.1 조치 이후 매년 300~400%의 물가인상률을 기록하였다. 국정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는 30~40배를 넘어섰다. 북한은 베트남보다 더 심각하였다. 만일 북한이 이와 같은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면 당연히 베트남처럼 사적 생산을 자극하는 정책이 우선되어야 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역으로 북한은 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시장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2004년, 2007년 두 차례 형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2007년 10월에는 개인장사는 5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허용하도록 하였고 올 7월에는 북한 최대의 장마당인 평성시장을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번의 화폐교환조치는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만 시장에서 축적된 民富를 몰수하고 국가통제경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시장통제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