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김정일”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정부의 한 강경파 관리는 쾌재를 불렀다고 워싱턴 포스트의 글렌 케슬러 기자는 최근 발간된 책에서 전했다.
북핵 문제를 놓고 조지 부시 행정부 내 협상파와 강경파가 팽팽하게 대치하던 당시 상황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한 것은 제 무덤을 판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 핵실험 이후, 세계적인 비난과 우려가 빗발쳤고 유엔 안보리는 중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한 가운데 대북 제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도 북한에 ‘핵과 미래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고 경고하는 등 북한과 대화 얘기를 꺼내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는 급랭했다.
그러나 북한 핵실험으로부터 1년이 지난 2007년 10월 현재의 상황은 딴 판이다.
벼랑 끝으로 치닫던 북미 양측은 갑자기 되돌아서 대화의 테이블에 마주앉았고, 영변원자로 가동중단과 연내 불능화, 전면신고 합의를 이끌어내며 비핵화 고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이다.
도무지 해법이 없을 것만 같던 방코델타아시아(BDA)라는 대북 금융제재 문제도 모두 풀린 채, 이제는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 제외와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본격 논의하는 국면까지 펼쳐지고 있다.
‘벼랑 끝의 반전’이란 말을 실감나게 하는 북미 양측의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부시 행정부로서는 이라크와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동 사태 등이 모조리 꼬이기만 하면서, 제대로 된 외교업적 하나 정도는 남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북핵 문제해결에 발벗고 나서게된 배경이라는 지적이 있다.
부시 행정부 6년의 대북 정책은 실패했으며 북한은 결국 핵을 보유하게 됐다는 자성론과 이제는 어떻게든 북한의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협상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있다.
부시 행정부 초기 서슬퍼랬던 강경파들의 몰락과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정치구도의 변화, 북핵 해결사 힐의 뛰어난 역량,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역할 등도 꼽힌다.
어쨌든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 때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였던 부시는 “나는 이제 결심했다. 북한 지도자가 결정할 차례”라고 천명할 정도로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지난해 7월 미사일 시험 발사에 이어 핵실험을 강행하며, 미국과의 무한 대결을 불사할듯 하던 북한도 지난해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와 비관론에도 불구, 영변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불러들였으며 영변핵시설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전면신고를 구체화한 2단계 합의에도 동의했다.
우라늄 농축 핵프로그램 의혹 해명도 약속했고, 무엇보다 핵포기라는 북한의 기본 정책에 변함이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북한의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김정일이 마침내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룩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북한의 당면 경제난, 특히 미국의 금융제재 압박을 겪으면서 협상 노선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으리란 관측에서부터, 이미 핵을 보유한 이상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는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지적, 효용이 다한 영변핵시설을 카드로 최대한의 지원을 얻어내려는 전술이라는 추측 등이 다양하다.
정확한 이유가 무엇이든 북한과 미국은 모두 협상을 통해 핵문제를 풀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행동 대 행동’을 원칙으로 한 1단계 합의 이행을 마쳤으며, 2단계 합의 실행도 다짐하고 있다.
북미 양측은 특히 6자회담의 진전에 맞춰 뉴욕필의 평양공연 등 문화교류 확대를 모색하고, 미국이 대규모 대북 식량과 인도적 지원에 나서는 등 상호 신뢰구축 조치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안보체제 구축이라는 6자회담의 목표가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오는게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북미관계 정상화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선뜻 자신있게 전망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북한이 핵무기 포기라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는지를 아무도 단언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선 결국 핵을 포기할 것이란 북한의 다짐을 그대로 믿을만한 증거가 약하다. 아마 김정일 스스로도 전략적 결정은 아직 하지 못했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북한이 실험까지 한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우세하며, 김정일 조차도 북한 군부 등 강경파의 핵포기 반대를 꺾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다.
경수로 문제 등 해법이 보이지 않는 난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돌발 변수가 나올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협상은 언제든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비관론 쪽에 무게가 실린다.
결국 북핵 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막연한 추측보다는 앞으로 북미 양측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린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2단계 합의 이행과정에서 핵프로그램을 얼마나 충실히 신고하고 검증을 허용하는지, 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을 정말로 말끔히 해소할 것인 지에 따라 북한의 비핵화 결심 여부는 좀 더 분명한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내년으로 넘어가 북한이 50여㎏의 플루토늄을 정말로 내놓을지, 핵무기 해체에 동의할지를 지켜보면 북한의 전략적 결정 여부는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북핵협상의 현주소를 힐 차관보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지만, 갈 길은 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훨씬 많다”고 표현하고 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