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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북한인권운동을 하는데 눈치 보지 않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73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인호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10년 만의 정권교체’ 의미를 이같이 요약했다.
여성 최초로 러시아, 핀란드 대사를 역임한 바 있는 그는 2005년 제2회 ‘북한인권국제대회’ 공동대회장을 맡으면서, 그동안 국민들의 관심 밖으로 여겨졌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2006년 로마에서 열린 제4회 북한인권국제대회에선 북한 인권문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규정하며, 김정일 정권의 실상을 폭로했던 이 교수를 9일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북한도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며 “북한 체제가 완화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을 느끼게 했다.
이 교수는 핀란드 대사 시절 김정일의 이복동생이자 핀란드 대사였던 김평일을 만났던 일화도 소개했다.
“김 대사가 핀란드에 부임한 것은 김일성이 죽기 몇 달 전이었다. 그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김일성이 갑자기 죽자 본국으로 송환됐다가 6개월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왔다. 김일성이 죽기 전에는 수행원들이 (김평일을)왕자같이 대우했는데 이후에는 완전히 감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핀란드 대통령 궁에 대사만 초대됐을 때만 말을 걸 수 있었다”며 “이복형이 권력을 잡았다는 고충을 알고, 이를 감안하는 수준에서 대화할 수밖에 없어 깊은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이 교수는 ‘평화’를 앞세워 북한 인권문제를 도외시 하는 세력에 대해 “북한 인권문제를 포함하지 않는 남북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정일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자주 애용하는 ‘민족공조’란 단어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 그는 “좌파들의 ‘민족공조’를 비판하는 것은 김정일 정권과 공조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은 외교 강국이다. 사진 한 장 찍기 위한 얄팍한 외교술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며 “북한을 하나의 외국으로 대해 상호성을 갖고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도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북한의 변화도 촉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건국 역사를 재평가 하고 있는 이 교수는 “지난 10년은 건국 역사를 깎아 내리는 사람들이 집권했다”며 “한국 사회가 눈부신 발전의 초석을 다진 건국을 떳떳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이인호 카이스트 석좌교수 인터뷰 전문]
–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계신데, 건국60주년에 주목하는 이유는?
“올해가 건국 60주년이 되는데 축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인조차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건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을 각성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 위원회의 존재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각 지방자치체하고 문화단체들을 중심으로 민간차원에서 건국을 기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추진위원회 설립의 계기는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 건국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의 젊은 세대가 현대사를 이해하는 자세도 상당히 잘못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 분단을 이유로 ‘반쪽짜리’라며 건국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까지 있는데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의 설립을 원치 않은 세력과 싸워 나라를 지켜내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건국세력은 바로 이러한 눈부신 발전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에 반드시 기념돼야 한다. 통일지상주의자들은 건국 당시 북한쪽으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동유럽이나 북한의 모습처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4∙19를 혁명으로 표현하면서 건국을 깎아 내리는 이들까지 있다. 4∙19를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4∙19는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데 대한 항거였지 체제를 부수고 전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이기 보다는 의거였다. 좌파친북세력이 4∙19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 좌파진영의 ‘민족공조론’을 자주 비판하신다.
“민족공조란 구호를 싫어하는 것이다. 민족으로서 서로 아껴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 구호로 이용하면서 실제로는 민족을 사랑하지 않고 역이용하려고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특히 민족공조라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김정일 정권과 공조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북한 동포가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가만있겠다는 것은 국제사회에 떳떳할 수 없다.
북한은 엄연한 정치체다. 따라서 우리는 인도적 지원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볼 때 최소한 목숨을 걸고 탈출한 탈북자에 대해서만 이라도 도와야 진정한 민족공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통일, 민족공조를 외치며 김정일을 돕자고 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북한에 이용만 당하는 것이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평가한다.
“지난 10년은 억눌렸던 사람이 기를 펴보고 한번 책임을 맡아 봤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이 의욕만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로 돌아가면서 권력의 책임을 져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난 10년은 경험이 없으면서 무식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을 저질렀다. 북한에 철저히 이용당하는 것도 모른 채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북한에 이용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추진한 사람도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번 선거를 보면 우리 국민들은 극에서 극을 경험한 이후 균형 감각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부패에 대한 염증과 기득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반대편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86은 희생자다. 하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서 뛰다가 대학시기를 잃어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반미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친북반미 민족주의 노선의 편향성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로 무식하게 좌우가 치고받았던 시기는 끝났다. 이는 지난 10년의 긍정적인 면이다.”
– 핀란드 대사 당시 김정일의 이복독생인 김평일을 만난 것으로 안다. 당시 경험을 소개해 달라.
“당시 김평일 대사가 핀란드 대사였다. 김 대사가 핀란드에 부임한 것은 김일성이 죽기 몇 달 전이었다. 그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김일성이 갑자기 죽자 본국으로 송환됐다가 6개월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왔다. 특징적인 것은 그전에는 수행원들이 왕자같이 대우했는데 이후에는 완전히 감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대화하는 것도 그 쪽 수행원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핀란드 대통령 궁에 대사만 초대됐을 때만 말을 걸 수 있었다. 이복형이 권력을 잡았다는 고충을 알고 감안하는 수준에서 대화할 수밖에 없어 깊은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김정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물을 수 없었고 그 쪽에서도 하지 않았다.”
– 북한인권문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이라는 사회는 스탈린식의 독재와 동양의 전제주의적 독재 등 부정적 요소를 다 갖고 있다. 사람이 결국 기를 못 펴고 억눌려 사는데 어떻게 잘 살 수 있겠느냐. 그 체제가 완화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자유가 있을 때 항의도 하고 정치적 구호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최근 탈북자가 계속 생길 수 있다는 것은 그 전보다 컨트롤이 약화됐다고 보여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진다.”
– 북한인권운동이 한반도의 평화를 깨고 북한의 붕괴를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인권문제를 포함하지 않으면서 남북관계가 어떤 의미가 있느냐. 말이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국군포로, 납북자의 인권을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얼마나 좋아진다는 말인가. 또 북한의 싼 노동력을 우리가 이용한다는 것도 부도덕한 주장이다. 북한이 남한의 식민지같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얘기인가.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도 그 체제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낫다고 평가됐기 때문이다. 친북세력은 북한을 살릴 수 있어서, 반북세력은 북한의 노동력 등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출발부터 잘못된 논리였다. 일단 통합이 되면 어느 한쪽을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특히 민주주의와 독재가 어떻게 절충될 수 있겠는가. 독재가 되든지 민주주의가 되든지 할 것이다.
박정희 시기에도 직업, 거주의 자유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유동성이 있었던 사회다. 정치적으로 독재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북한의 인권이 유린되는 독재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북한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 대화의 상대인 김정일 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궤변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에 대해서 항거했던 사람들로서 주장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북한의 동포를 한꺼번에 도울 수 없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북한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김정일과 그 측근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 한국사회는 북한을 한편에선 어린애 다루듯이 하고 또 한편에선 무서워 피하고 있다. 북한은 외교 강국이다. 우리같이 중구난방으로 하지 않는다. 사진 한 장 찍기 위한 얄팍한 외교술로 대해야 할 상대가 아니다. 원칙을 분명히 세워 북한을 대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특히 북한인권 정책에 대해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나는 북한을 하나의 외국으로 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부와 외교부를 합치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교관계는 통상 상호성이 있어야 한다. 지원하면 진지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 2000년 이후 대북 포용정책은 결국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갔다. 쇼 비즈니스 같이 선전효과의 대상으로만 비쳐졌다. 소위 민족공조를 외치는 사람들에 의해 대북정책이 좌지우지 됐기 때문이다. 할 말은 해야 한다.
우리나라 안에도 보수에서 진보까지 정치적인 의견의 스펙트럼은 다 있어야 한다고 본다. 불행한 것은 건전한 진보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진보세력이 친북세력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진보세력이 탈바꿈하지 않으면 나설 수가 없다. 최근 민노당 내에서의 목소리는 그런 면에서 다행스런 모습이다. 또 경제만 잘 되면 모든 것이 풀린다는 생각도 잘못됐다.
일만 명이 넘는 탈북 동포들을 껴안는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그걸 하지 못하면서 민족공조내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게릴라전이 아니라 본격적인 전투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는?
“북한인권운동을 하면 눈치를 봐야 한다. 2005년 국제대회 당시 공동의장을 할 때 친구들이 나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돈을 지원하고 싶은데 겁이 나서 못하더라.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도 우리가 줬다고 하지 말고 네가 줬다고 하라고 하더라. 이런 사람들이 떳떳하게 지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