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칼럼란에 기고한 글에서 필자는 이번 김정은의 전쟁협박의 목표가 대남협상제의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실제로 그러함이 어제 오후 3시 확인되었다. 이후 오후 6시에 시작된 한국의 김관진·홍용표와 북한의 황병서·김양건 간의 남북협상은 23일 새벽 4시 경에 일단 중지되었다. 이 협상은 북한이 전쟁상태 돌입협박 이전에 이미 계획한 것이 분명하다. 즉 북한의 ‘도발+전쟁협박+협상제의’의 세트플레이는 박근혜 정부의 남북대화 제안과 경제지원의사 표명에 대한 북한정권의 반응이다.
즉 임기 후반에 들어선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비전의 실현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한국이 북한의 국지도발과 전쟁협박의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대북경제지원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작전이고, 이점을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호칭 사용과 전쟁위협 이후 ‘남북긴장완화’라는 명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박근혜 정부가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하고 북한의 작전에 말려들 가능성이다.
여기서 한국과 북한의 남북대화 구조가 얼마나 북한 측에 유리한지를 구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는 계간 <시대정신> 2015년 여름호에 게재한 내용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I. 지도자의 비전에 의존하는 대북·통일정책의 게임 규칙
남북관계에서 다른 국가들의 역할을 제외하고 대북·통일정책을 남북의 양자 게임이라고 가정하자. 휴전 상태의 남과 북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지만, 남측의 지도자가 ‘자신의 비전에 의해 새로운 대북・통일정책(Vision-P)’을 제안하면서,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적대적 남북관계의 변화를 시도할 때, 일반적으로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수단1: 경제적 지원
수단2: 남북대화 활성화
목적1: 중・단기적으로 북의 개혁・개방
목적2: 장기적으로 남북통일
임기내 목표: 부분적으로라도 실현
목적1은 한국 측은 기대하지만 북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목적2는 남과 북 모두 강조하지만 서로 배척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차이로 인해 Vision-P에서는 명시적으로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통일체제는 통일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대북・통일정책의 의미를 완전히 결정한다. Vision-P의 임기내 목표는 이 정책을 제안한 한국 대통령의 주관적 심리상태와는 무관하게 완전히 객관적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내 성과에 연연하여 대화를 위한 대화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더라도, 자신의 임기 내에 자신이 제안한 정책이 부분적으로라도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Vision-P의 성공은 남과 북이 이 정책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지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일단 양측은 자신의 체제를 포기하면서까지 남북대화의 성공을 바라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기서 한국은 경제지원(수단1)과 남북교류(수단2)를 통해 남북의 적대관계를 종식하면 북에 의한 안보 위협이 줄고, 단기적으로는 일방적으로 북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양측에 이익이 되며, 나아가 개혁개방(목적1)과 통일(목적2)도 어떻게, 언제인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추구한다. 특히 Vision-P는 ‘상생과 공동번영’, ‘적대관계 종식’, ‘평화와 통일’이라는,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강한 호소력을 지닌 희망의 언어로 이루어져 국민의 지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북한은 ‘Vision-P’에 어떤 접근을 하고 있나?
북의 경우에는 Vision-P를 첫째, 정치적으로 체제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둘째 경제적으로 북한에 이익이 되는 한에서, 셋째 북한이 원하는 방식의 통일로 이어지도록 변형하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이점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다.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거부감은, 김대중 정부가 제안한 햇볕정책에 대하여 북한이 초기에 북한체제 전복을 위한 ‘독이 든 사과’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는 점에서,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김정일이 개혁・개방의 가능성을 단호히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남측이 제안하는 경제적 지원과 상징적 이벤트에 대해서는 북한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른바 남북교류에 북한주민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모기장을 뒤집어씌우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북한이 남북대화에서 경제적 지원과 함께 매우 중요한 목표로 보는 것은 북한이 원하는 통일방식의 관철이다. 이점은 6・15선언에 포함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말해주고 있으며, 그 최종 목표는 한반도 전체의 북한식 사회주의화, 즉 적화통일에 있다. 그러나 북한정권이 당장 연방제 통일의 실현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매우 큰 설득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연방제로 통일이 될 경우 북한의 수령체제가 와해될 가능성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연방제와 같은 통일원칙을 추구하면서, 한미동맹해체, 북한체제수용 등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일차적 관심이 있다. 북한의 통일전략은 1) 남북이 평화통일을 하려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해야 하고 2) 한국 지도자가 북한의 체제를 통일과 관련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한다면, 논리적으로 한국내 친북・종북세력 역시 북한체제를 인정・찬양하거나 통일체제로 주장할 수 있으며, 3) 이런 집단이 정권을 잡게 되면 남북이 북한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통일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다른 한편 북한이 주목하는 한국의 약점은 Vision-P의 임기내 목표이다. 대북・통일정책은 대통령의 비전이므로 한국정부가 강력하게 시도할 것이고, 그 실현 혹은 실현의 시작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요구 상당부분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요구는 당연히 경제적 지원(수단1과 수단2)과 통일론(목적2)에 집중된다. 예를 들어 햇볕정책은 초기에 북한에 5억불 이상의 비합법적 자금 제공과 김대중-김정일의 6・15선언 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라고 합의하였다. 사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은 독안의 든 쥐나 다름없으며, 이런 점에서 김정일은 냉정하고 노련한 게이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6・15 선언은 한국 내에 종북주의의 공개적 발호(跋扈)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점은 이적단체로 규정된 모든 집단이 6・15선언의 실천을 주장하거나 ‘6・15선언’이라는 표현을 단체명에 갖고 있는 것만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南경제지원, 北 대화에 응하게 할 강한 유인책 아니다
여기서 한국 지도자의 비전에 의존하는 남북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게임의 규칙이 확인될 수 있다. 즉 북한이 어떤 행동에 나서 줄 것을 각종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권유하는 Vision-P는 북한이 비행동(Non-Action)으로 언제라도 실패하도록 만들 수 있기에, 대화의 시작을 위해서도 막대한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적 난관이나 국제적 고립에 처한 북한이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한국의 관대한 Vision-P에 적극 동참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북한의 수령전체주의는 체제유지를 위해 필요한 자금이나 외화는 갖고 있으며, 심지어 매년 2.5-4억 불 정도를 축적하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즉 한국의 경제유인책은 북한 정권이 남북대화에 응하도록 강제할 만큼 강한 요인은 아니다.
따라서 Vision-P는 제안되는 순간부터 북한의 무반응으로 실패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이때 한국은 실패를 피하기 위해 두 가지 길을 가게 된다. 첫째 북한이 어떤 도발이나 요구를 하더라도 가능하면 들어주고, 둘째 이에 대하여 각종 상징적인 교류와 이벤트를 벌여 한국 국민에게 Vision-P가 성공적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따라서 남북대화에서는 인과관계의 도치현상이 발생한다. 북한에 대한 지원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대화불응・중단, 심지어 도발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갖고 온다. 여기서 햇볕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에 적지 않았던 북한의 대화 중단과 도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도발은 남북교류로 인한 북한체제의 이완을 방지하기 위한 측면과 함께, 한국이라는 팽이에 대한 채찍질 같은 효과를 갖고 있다. 북한이 도발하면 할수록 Vision-P의 신봉자는 그 실현에 더 매달리게 된다. 일종의 정치적 사도매조키즘(sado-masochism)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흔히 생각하듯이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한국이 들어주는 것으로 대화와 교류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Vision-P의 문제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주장이나 비전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원하지 않는다. 즉 Vision-P의 주창자는 물론 이 비전에 기생했던 적지 않은 수의 정치가, 대학교수, 언론, 시민단체, 관료들은 자신들의 비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기 보다는 역으로 그 비전의 정당성을 내면화한다 : Vision-P는 현 정권에서 충분히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일 뿐, 미래(다음 정권)에 계속되면 반드시 성공한다! 바꿔 말해 한국의 지도자의 강한 비전에 의존했던 대북・통일정책은 ‘현재의 실패를 부정하고 미래의 성공을 확신한다’는 점에서 종교화되며, 지지자들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의 신도로 변한다. 햇볕정책 시절에 임동원이 제창한 ‘先供後得(선공후득)’이라는 표현은 현세 보다 내세를 추구하지만, 현세의 성실한 행위가 내세의 구원을 약속한다는 종교의 슬로간과 다름없다.
II. 북핵 문제가 추가된 남북대화
1994년부터 남북대화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바로 북핵문제다. 북핵문제는 남북의 양자 게임 보다는 6자회담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간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도발적이며,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만 핵을 개발하고 있는 북한’은 결과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수많은 대북지원과 핵폐기 혹은 핵동결을 바꾸자는 합의에 이르렀지만 그 결과는 핵폐기・핵동결 합의의 폐기였다. 그 이유도 실은 위의 남북대화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나온 결과 혹은 6자회담 자체를 회담거부, 회담중단 혹은 합의 불이행으로 실패로 돌릴 수 있는 위치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이 6자회담에 매달리는 이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자기 위안적 태도에 있다. 나아가 북한의 비행동에 의한 북핵문제 미해결은 6자회담, 미북회담, 남북회담 등 각종 회담에서 상대방이 새로운 제안과 인센티브를 제안하도록 만드는 원인이기에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핵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여기서도 인과도치와 흡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또 성과가 전혀 없는 원점회귀성 6자회담에 대해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성을 갖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참가하겠다는, 이른바 미국의 ‘전략적 인내’도 ‘끌려가는 대화를 더 이상 하지 못 하겠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비핵화를 이룰 수 있는 어떤 전술이나 전략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한국의 지도자는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Vision-P의 실현과 북핵문제 해결을 원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3가지이다.
대안1: 비핵화=Vision-P의 전제
대안2: 비핵화=Vision-P의 결과
대안3: 비핵화와 Vision-P의 실행과정 연계
대안1에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 속하며 ‘입구전략’이라고 부른다. 대안2에는 2012년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대북・통일정책이 속한다. 그는 한미동맹의 위상 변경과 남북경제공동체를 거쳐 남북국가연합에 이르면 북한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이른바 ‘출구전략’을 제안하였다. 대안3에는 박근혜 정부의 남북대화와 비핵화의 선순환 전략이 속한다.
대안1의 문제는 북한이 Vision-P에 응하지 않을 경우, 북한도 경제적 손해 내지는 경제구조의 변화를 감내해야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는 전혀 진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갖고 있었던 문제이다. 대안2의 문제는 북한의 확실한 선의를 가정해야 하지만, 너무나 큰 안보 리스크를 갖고 있다. 대안3의 문제는 입구전략인 대안1과 출구전략인 대안2의 문제점을 모두 갖고 있다. 북한이 Vision-P에 응하지 않거나 일정한 단계까지 한국의 경제지원을 받고 중단할 경우, 혹은 비핵화를 약속하고 일부 실행하더라도 노무현 정부 시절처럼 지연작전을 쓰면서 박근혜 정부 임기 후반에 대규모 약속을 얻어내려고 시도하거나 최종단계에서 무효화할 가능성은 극히 높다.
III.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박근혜 정부는 일종의 섬으로 남아 있는 한국을 남북한을 관통하는 철도와 에너지 공급라인을 통해 대륙과 연결시키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하고 있다. 이런 철도와 가스파이프라인 건설 제안은 과거에도 여러 번 시도되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동북아 평화구상 등의 연계를 통해 어떤 전임자들의 것보다 확장된 Vision-P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파트너로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우호적인 국가들이지만, 이들이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북한의 비핵화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결합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포함한 Vision-P에 어떻게 대응할까? 여기서 우리는 남북대화의 가장 중요한 구조를 다시 보아야 한다: 북한이 한국의 Vision-P에 대응하지 않으면 Vision-P는 실패한다. 즉 비행동(Non-Action)이 행동(Action)을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만일 북한이 경제적인 난관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은 한국이 제공하는 경제지원만 받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또 경험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북한이 개혁・개방, 비핵화,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북한이 외부와의 경제교류에서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김정은이 만든 수많은 경제특구가 개방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오로지 그의 통치자금 마련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따라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통해, 2001년 북한과 러시아의 모스크바 선언에서처럼, 남북의 철도가 대륙의 철도와 연결되고, 러시아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한국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수령전체주의의 존속을 제1의 목표로 삼는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통해 한국은 차라리 더 착잡한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남북의 철도와 에너지 공급원이 대륙과 연결된 후에 북한이 핵실험이나 강한 도발을 할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로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나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운행을 중단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경우 제재대상은 북한이지 러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경제의 일부 역시 대륙철도와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는 상황이 될 것이고, 따라서 북한이 도발이나 핵실험을 하여도 현재의 개성공단처럼 철도나 파이프라인은 계속 작동될 것이며, 북한정권은 이를 통해 외화나 에너지를 계속 공급받을 것이다. 바꿔 말해 북한의 핵실험이나 도발에 대한 대북제재 가능성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훨씬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나 파이프라인의 건설을 갖고는 결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성공하였다고 판단할 수가 없다.
IV.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의 재평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동일한 구조의 양자게임이다. 즉 ‘한국의 행동 제안에 북한도 적절한 행동으로 반응할 것이다’라는 비전들이지만, 이러한 게임 규칙 하에서 한국이 구조적으로 불리함은 명백하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표면상 동일한 게임으로 시작하였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음이 확인되었다. 즉 ‘비핵・개방・3000’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Vision-P에 북한은 행동으로 반응하지 않아 이 정책은 표면상 실패하였다. 그러나 천안함 폭침 이후 취해진 5・24조치는 한국의 대북 경제지원을 최소화한 비행동이었지만, 북한은 여기에 행동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북한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였다.
5・24 조치는 두 가지 점에서 북한 경제체제에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이명박 정부의 천영우 전외교안보수석은 2013년 1월에 출간된 12권의 『이명박 정부 5년 백서』 제5권 『원칙에 입각한 대북관계』 서문에서, ‘5.24조치로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경제 교류・지원 중단 ⇒ 식량부족 ⇒ 배급제 사실상 포기 ⇒ 장마당 역할 증대 ⇒ 장마당 통제 포기 ⇒ 정권에 대한 충성심 약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5・24 조치 이전에는 한국으로부터 조달되는 외화로 중국으로부터 소비재 수입을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북한은 중국에 석탄을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동시에 김정은 정권은 휴대폰 판매와 같이 내부 외화 수집과 함께, 인력수출을 더욱 확대하여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그 결과 2013년에 약 5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외국(중국, 러시아, 중동, 동유럽 등)에 나가서 외화를 벌고 있으며, 북한당국이 이들의 생활을 통제하여도 외부세계의 정보는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5・24 조치는 북한 사회의 개방은 아니지만 개방과 흡사한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다.(이석, “5·24 조치, 장성택의 처형 그리고 북한경제의 딜레마”, KDI Focus, 통권 제37호, 2014.3)
V. 게임 체인저의 필요성
남북대화를 통일대화와 동일시하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입장1: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그리고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통해 한반도의 통일이 남북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국익에 분명하게 도움이 된다.
입장2: 한반도 통일은 한국 주도의 통일이 아니라 사실상 남북 공존의 통일이다.
입장3: 남북통일을 향한 대규모 교류를 위해서는 한미동맹 강화와 국가정체성의 확인이 필요하다.
사실 위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햇볕정책 지지자들을 외교・통일・안보 영역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한반도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지점이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위해서는 우선 안보강화가 필요함을 잘 이해하였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훼손한 한미동맹 관계를 복원하고, 종북주의 통진당을 해산하였다. 다른 한편 시진핑의 중국과 한중 FTA, 그리고 푸틴의 러시아와는 나진-하산 프로젝트와 한-러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의향을 통해 대륙세력과의 경제협력 관계를 확대하여 북한의 배후에 한국의 지원세력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박근혜 정부의 확장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입장 3개로부터 다른 결과를 얻어내려고 할 것이다. 우선 입장1은 북한이 외부로부터 경제지원을 얻어내는 펌프로서 사용하고, 입장2는 7・4 공동성명, 6・15 선언, 10・4 성명과 함께 이른바 ‘자주통일원칙’을 통해 한국사회 내에 북한체제를 인정하거나 옹호하는 세력의 재건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또한 입장3에 대해서는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과 핵동결을 연계하여 한미동맹약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북한이 내걸고 있는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은 동시에 남북대화 중단조건 혹은 도발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은 그들이 내세우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아도 큰 양보를 한 듯 남북대화에 응한 후, 주기적으로 한미연합훈련이나 북방한계선(NLL)을 트집삼아 남북대화를 중단시킬 수 있다. 이 경우 ‘High Risk High Return’의 성격을 갖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은 막대한 후유증을 남길 것이며, 다음 정권의 성격과 그 대북・통일정책을 더욱 더 취약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의 성공여부는 한국이 남북대화의 구조 변화를 통해 게임의 규칙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바뀌어야 할 남북대화의 구조는 무엇인가?
구조변화1: 한국은 북한이 Vision-P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였거나 놓이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위의 구조변화1가 필요한 이유는 북한의 비행동 가능성이 한국의 대북・통일정책 실패의 가장 큰 이유이며,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모든 Vision-P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었다. 현재 북한이 남북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남북대화가 북한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이지는 않다. 김정은은 김정일과는 달리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복원을 포기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핵심지지층에게 ‘정상국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충성을 유도하는 평양공화국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북한주민의 먹고사는 문제는 장마당경제와 뇌물시장경제를 통해 해결되도록 방치하고 있다. 여기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김정은은 광물개발권이나 어업권을 중국에 팔고, 인력수출을 통해 한국의 경제지원 없이도 외화를 확보하고 있으며, 연구에 의하면 지난 20년간 평균 매년 2.5-4억불 정도의 외화를 축적하였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한국정부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한국의 경제지원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다른 한편 비핵화를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는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대화참여 가능성만으로는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특히 남북대화와 비핵화의 선순환 시도가 실패한다면 당연히 비핵화도 실패한다. 따라서 북한과의 대화와 비핵화가 모두 실패하였을 경우를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구조변화2: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고 비핵화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한국주도의 통일이 가능한 상황이 존재한다.
북한이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통한 평화공존통일의 프로세스에 적극 나서지 않을 경우,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 주도의 통일을 지지한다면 남북대화의 게임의 규칙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조변화2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에게는 북한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북한에는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립관계에서 한국을 대륙에 종속시키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붕괴를 스스로 추진할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북한과의 평화공존과 합의통일 및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앞의 두 구조변화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막대한 리스크를 갖게 된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또 다른 구조변화인 플랜B를 시도해야 한다.
플랜B: 한미동맹을 비롯한 국제 공조 하에, 북한에 정치・경제・사회・군사 분야에서 강한 압박을 통해 비핵화와 전체주의 사회의 토대 해체를 추진한다.
상식에 비추어 보면, 한편으로 대화를 촉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강한 제재와 압박을 가하는 것이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은 ‘선의(善意)의 확인이 아니라, 적의(敵意)의 해소를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남북분단과 대치상황에는 훨씬 더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한국과 북한 모두 무력으로 상대방의 적의를 제거할 경우 너무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2015년 8월,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대북확성기 방송재개→북한의 포 도발→한국의 대응포격→북한의 전쟁협박→한미동맹의 강한 대응의지의 전개과정에서 북한은 전쟁협박과 동시에 협상제의를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은 협상장으로 불러내는 것은 경제지원도 아니며, 한국의 좌파의 상투적인 평화제일주의나 남북대화의 구걸도 아니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지 않거나 도발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이 느끼는 남북대화의 필요성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MB정부의 5.24 조치를 남북대화의 장애물로 보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단견이다. 북한 스스로 대화의 조건으로 5.24 조치 해제를 요구하고 나온 것은 북한이 5.24 조치의 해제를 위해 남북대화를 이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한이 이런 저런 조건을 제시하며 남북대화에 나서지 않는다 해도 한국 정부는 기다릴 필요가 있다.
북한은 남북대화의 이런 본질을 오래전부터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지도자의 비전에 스스로 넘어가 북한에 대한 제재를 남북대화의 장애요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같은 통일 지향적 남북대화를 책임 있게 추진하려 한다면,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올 수밖에 없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실패했을 경우라도 중・러가 한국주도의 통일을 지지한다는 것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거대 담론의 남북대화가 실패할 경우를 가정하면서 동시에 북한체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플랜B를 가동해야 한다.
플랜B라는 게임 체인저를 포기하고 시작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의 비행동 전술에 의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또한 김정은의 무모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을 키워서 북한체제 변화의 토대변화를 만들려면 플랜B는 항상 준비・가동되어야 한다. 북한의 소니픽처사 해킹 후에 나온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플랜B를 통한 ‘북한붕괴론’은 북한과의 대화구조를 볼 때 항상 필요한 게임의 규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