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북한 근로단체 조직들 가운데서 가장 힘 있는 청년단체로 꼽히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 창립 63돌이다. 북한 정권의 역사에서 청년동맹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조선노동당의 전위조직, 외곽단체로서 청년동맹이 차지하는 기능과 역할이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김일성, 노동당 외곽단체로 청년조직 건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1946년 1월 17일 ‘북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으로 처음 발족되었다. 북한의 첫 권력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같은 해 2월에 조직된 것에 비하면 청년조직이 먼저 탄생한 것이었다.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은 해방 후 우익보수 세력과 친일파집단을 숙청하고 사회변혁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청년들을 장악하기 위해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군 지도부의 조정에 의해 창설되었다. 창설 초기에는 범 민주적인 청년단체로서 사회주의적이고 좌익적인 성향의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청년들까지 망라한 청년조직이었다.
그러나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고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이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변신하면서 김일성의 권력 구도가 형성되고 ‘북조선민주청년동맹’도 점차 노동당의 산하 조직으로 변질되어 갔다.
1950년 9월 남한을 침공한 북한군이 연합군의 공세로 후퇴하면서 남노당 소속 청년들과 북한군에 편입된 좌익청년들이 대거 북한으로 올라가면서 이들을 합쳐 1951년 ‘남북조선민주청년동맹’의 형식적으로 통합된 뒤 ‘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해방 후부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해방사에서 청년운동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 이는 북한에서 청년운동이 ‘북조선민주청년동맹’ 주도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노동당’과 조만식이 이끄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민주당’으로 양분되었던 사정과도 연관이 있다.
그러나 6.25전쟁을 전후하여 김일성이 조만식, 박헌영을 비롯한 세력과 남노당 세력을 완전 숙청하면서 ‘조선민주청년동맹’은 노동당의 전위조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전후 복구과정서 ‘군중동원’ 선봉대로 활약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전후 북한의 재건과정에서부터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후 복구건설과정에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의 영도를 통한 청년조직의 역할론을 강조하면서 ‘조선민주청년동맹’을 사회주의 건설의 선봉대로 이용했다. 이때부터 노동당의 주도하에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지방과 단체, 학교들에까지 기층청년조직들을 만들고 모든 청년들을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했다.
1964년 5월 ‘조선민주청년동맹 제5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청년동맹’은 ‘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으로 개칭했다.
북한에서 청년운동은 노동당의 전위조직으로서의 시대별로 그 지위가 달랐다.
올해 북한의 공동사설에 다시 등장한 ‘천리마 운동’은 ‘조선민주청년동맹’이 발기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김정일도 남산중학교(현 평양1중학교) 시절 ‘조선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 북한의 ‘전후 복구건설’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내부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로청은 1970년대 천리마 운동이 주춤해지고 김일성의 유일체계가 확립되면서부터는 이름만 남은 형식적인 조직이 됐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사로청은 북한의 다른 근로단체 조직인 ‘직맹’, ‘농근맹’, ‘여맹’ 조직들과 함께 건물조차 변변한 것이 없는 노동당의 ‘외곽단체’였다.
1970년대 중반 북한은 사로청 소속 청년들로 ‘속도전 청년돌격대’라는 상설적인 건설부대를 조직하여 북한의 크고 작은 건설에 강제적인 방법으로 청년들을 동원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활동이 없었다.
북한에서 청년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제13차 청년학생 축전(평양축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사실 북한은 평양축전을 끝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과정은 중국의 개혁개방,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같은 범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연계되어 있다.
평양 청년학생축전 시기 ‘제2의 노동당’으로 도약
사로청은 평양축전을 계기로 노동당으로부터 지방 사로청 조직들과 대학생들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아 실력을 발휘했다. 이때부터 사로청은 다른 기관들과 건물을 함께 사용하던 시, 군 사로청 건물들까지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상근간부들도 대폭 늘렸다.
북한 수뇌부가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동기는 평양축전에서 청년조직을 역할을 보장해주자는 취지도 있었지만, 당시 중국을 비롯한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에 젖어가는 청년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19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 붕괴를 지켜보던 북한의 수뇌부는 북한 청년들의 사상교양사업과 조직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로청을 노동당 다음가는 조직으로 키웠다.
하지만 이렇게 사로청에 권력을 부여해 주고 몸집을 키워준 후과도 만만치 않았다.
평양축전을 계기로 사로청은 그동안 형식적으로 존재해 오던 ‘청년중앙예술선전대’를 전문 예술인 집단으로 만들고, 산하에 ‘은별무역회사’라는 독자적인 외화벌이 기관까지 설립했다.
또 해외에 나가는 체육응원단들을 선발하는 권한까지 모두 확보하는 한편, 사로청 내부에 ‘불량청소년 그루빠’라는 상설 검열기관까지 만들며 권력과 돈, 조직 동원력과 검열 권한까지 두루 갖춘 ‘제2의 노동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김일성 사후 1996년 1월 북한은 사로청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칭했으며, 지방에 있는 조직 인원을 보강했다. 또한 종전의 위원장 제도에서 비서제로 조직을 격상시켰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 이후 북한에서는 청년동맹의 파워가 노동당을 능가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외화부족에 시달리던 북한의 상황에서 2~30대 청년 인텔리 층을 1차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청년동맹의 외화벌이 능력은 곧바로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북한의 인민군과 공안조직(국가안전보위부)가 2000년대 들어 외화벌이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에 반해, 청년동맹은 이미 사로청 시절 평양축전 준비과정에서부터 중국, 마카오, 중동 등지에서 외화벌이의 토대를 닦아 왔기 때문이다. 특히나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체를 보관하기 위해 건설했던 금수산기념궁전의 건축비(8억달러 추정)의 상당부분을 청년동맹이 책임졌다는 후문이다.
北 2세대 권력자들의 진면목을 보여준 ‘최룡해 사건’
거대한 몸집을 가진 권력집단으로 자라난 청년동맹은 1998년 최룡해 제 1비서가 뇌물수수 불법행위로 해임·철직되면서 은별무역회사 사장, 대학생지도과장을 비롯한 간부들 수십 명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되었으며, 중앙조직 간부들과 스캔들에 휩싸인 중앙청년예술선전대 배우 수십 명도 청진시 수남구역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최룡해는 북한 2세대 권력층의 부패와 위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최룡해는 김일성의 절친한 빨치산 동료이자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최 현(1982년 사망)의 아들로 최 현은 1970년대 김일성의 장남 김정일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의 권력 암투 과정에서 일관되게 김정일을 옹호했던 경력으로 사망할 때 까지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
탄탄한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최룡해는 사로청 해외교양지도국장을 거쳐 사로청 제1비서로 승진하며 평양축전 ‘성공’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대기근이 1997년 수도 평양까지 뒤덮던 시절, 평양볼링장의 지하 오락소를 아지트로 삼아 일반주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초호화 유흥생활을 벌이다 1998년 철직을 당하게 된 것이다.
최룡해는 청년동맹 산하 외화벌이 기업소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달러를 이용해 각종 유흥을 즐기는 한편, 이른바 ‘장군님의 기쁨조’를 선발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예술단 여성들을 유린했다. 지금도 평양주민들과 인민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절 최룡해가 벌였던 방탕한 생활에 대한 일화들이 두고두고 회자된다.
최룡해는 아버지 최현의 후광 덕에 당시 청년동맹 중앙간부들 중에 유일하게 교화형을 면했고,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평양시 상하수도관리소 당비서로 좌천되는 가벼운 조치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 후 2003년 노동당 총무부 부부장으로 복권됐으며, 2006년 3월 현직인 황북도당 책임비서로 승진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개성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접하러 나올 정도로 김정일의 총애를 회복했다.
1998년 이후 최룡해를 대신해 청년동맹 제1비서가 된 이일환도 2001년 10월 측근들과 술을 마시고 자동차 사고까지 내면서 해임 철직되고 김경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최근에는 새로운 수장으로 김병팔(황해제철연합기업소 지배인 겸 당 책임비서 출신)이 새롭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北청년세대, 김정일 체제의 잠재적 모순될 것
청년동맹은 1990년 후반 북한에서 ‘선군노선’이 김정일의 통치전략으로 부상하면서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최룡해를 철직시킨 청년동맹 비리사건도 인민군 보위사령부에서 최초로 내사를 시작해 김정일에 보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창립 63돌을 맞은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2000년대 이후 청년동맹의 권한은 갈 수록 위축되고 있다. 인민군과 공안기관, 무역기관의 외화벌이가 활발해지면서 ‘외화벌이 성과’도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김일성 시대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 동원의 선봉대로 시작해, 1990년 중반까지 김정일의 통치자금 확보와 체제선전에 선봉장이었던 청년동맹은 선군정치 10년동안 점점 그 힘을 잃어가는 추세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 주체사상에서 강조하고 있는 “청년들은 새것에 민감하고, 정의로우며, 용감하다”는 명제가 북한체제를 향한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장기에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애국’보다는 ‘외국에 대한 동경’을 먼저 배우고, 수령절대주의보다는 개인주의에 먼저 눈을 뜬 북한의 청년세대들이야 말로 김정일 체제의 잠재적 모순 중에 가장 격렬한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청년동맹은 북한에서 만 14~ 35세까지의 청년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며 그 인원은 5백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하 조직으로 ‘조선소년단’, ‘속도전청년돌격대’, ‘청년중앙예술 선전대’ 등의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권력기관들에 기층 조직들을 두고 있다.
북한은 청년동맹이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1927년에 건설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시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며, 8월 28일을 ‘청년절’로 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