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정신적 식량 ‘정보’ 유입 위한 입법활동 벌일것”

▲ 데일리NK·국민통일방송은 1월 11일 유재길 前 은평미래연대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영상=유튜브 

13년 1개월 동안 중국서 북한민주화운동을 했던 유재길 前 은평미래연대 대표가 오는 4월에 있을 20대 총선에 출사표를 냈다. 유 前 대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소위 ‘주사파(주체사상파)’라 불리던 학생운동을 하다가 북한의 처참한 인권 현실을 깨닫고 전향한 인물이다. 북한을 추종했던 그가 북한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는 기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그는 북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혈혈단신 이주한다.

그랬던 그가 정계 입문을 결심하게 된 건 북한인권 개선이든 한반도 통일이든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가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도록 재정립돼야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서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던 중 2012년 3월 29일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등 3명의 운동가들과 중국 국가안전부(한국의 국정원)에 체포된 그는, 114일 간의 구금 끝에 ‘국가안전위해죄’라는 죄목으로 중국서 영구 추방된 바 있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북한인권 개선 방안을 골몰하던 그는 제도권 정치로의 투신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 11일 데일리NK와 인터뷰를 가진 유 前 대표는 “비영리민간단체(NGO)만으로는 ‘다소 자족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북한인권에 대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렵더라”면서 “2012년 한국에 돌아와 사단법인 시대정신이라는 NGO에서 3년 간 사무총장으로 지냈지만,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과 한반도 통일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려면 (NGO를 활동을 넘어) 법과 제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386 운동권 인사’다. 그간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에게는 대부분 ‘학생운동을 경력 삼아 정계에 진출하느냐’ ‘운동권이 현실 정치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지적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유 前 대표는 운동권 출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기자의 질문에도 의연했다.



20대 총선에 도전하는 유재길 前 은평미래연대 대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과 한반도 통일을 위해 제대로 일 하려면
법과 제도가 재정립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 사진=데일리NK

그는 “386운동권 세대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여의도로 향할 때, 나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아무런 기반도 없는 중국으로 떠났다”면서 “뚜렷한 명분과 기치, 확신, 희생정신 그리고 용기만을 갖고 험지 중의 험지로 갔다. 그런 실천력과 추진력이 오늘날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해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주사파) 학생운동을 하다가 내가 하는 일의 목표와 방법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반성했다”면서 “이후 한총련 개혁과 학생운동 혁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고, (한 때 사회주의 체제를 추종하는 등) 잘못했던 것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이를 바로잡는 데 나섰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민주화운동을 위해 중국에 갔을 때도 13년 간 인권운동만 한 게 아니라, 자금 조달을 위해 음식점 여덟 곳과 PC방 두 곳, 무역회사 한 곳을 운영하기도 했다”면서 “경영 과정에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등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현실감각과 경영 마인드는 내 자산이자 앞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데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유 前 대표는 현재 ‘은평을’ 지역 예비후보다. 첫 총선을 앞둔 정치 신인으로서의 포부를 묻자, 그는 주저 없이 본인이 내건 슬로건 ‘40대 기수로 세대교체’ ‘세대교체를 통한 은평의 새 판 짜기’를 내놓았다. 은평을 지역 출마를 위해 1년 가까이 주민들을 만나며 고민한 끝에 내건 공약이다.

그는 “이제는 보다 젊고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 은평을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은평의 교통난 해소와 주거환경 개선, 상권 활성화 등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1988년 대학 의예과에 입학하면서 서민들을 위해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그 초심은 여전하다”면서 “은평 주민들과 언제나 함께 하는,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개선시키고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Q. 날씨가 많이 추워 예비후보로서 활동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최근 근황은 어떤가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전철역 앞 혹은 주민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계신 곳을 찾아가서 인사와 함께 명함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후 아침 식사를 한 뒤, 나를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안부 연락을 드리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점심 식사가 끝나면, 오후에는 7개 동 약 4000여 개가 넘는 상가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다. 저녁에는 주민들에게 퇴근 인사를 하거나 각종 모임이 있으면 찾아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 하루 종일 일정이 계속된다. 피곤하진 않나.

육체적인 피로는 별로 없다. 내가 생각보다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웃음). 다만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어서 꾸지람을 많이 듣는다. 이럴 때 마음도 아프고 안타깝다.

Q. 안 그래도 각 지역마다 선거운동이 치열하다. 유 前 대표님은 이번이 총선 첫 출마라고 들었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북한민주화 관련 활동을 하다가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뭔가?

중국에서 13년 1개월 간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영구 추방됐다. 만약 추방되지 않았다면 중국에서 여전히 북한인권 증진과 북한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 국가안전부에) 연행이 돼 중국에서 영구 추방이 된 게 많이 아쉽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3년 간 NGO 활동을 했다. 사단법인 시대정신에서 사무처장과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다소 자족적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NGO의 사회적인 영향력은 많이 축소돼 있더라.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 일을 하려면, 또 한반도 통일을 위해 일을 하려면 국회의원이 돼 법과 제도를 만들고, 또 발언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싶었다.

Q. 지난 13년 간 중국에서 했다는 북한민주화운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었는지도 궁금하다.

중국에서 북한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는 아이디어는 독립 운동가들의 사례로부터 나왔다. 일제시기, 독립투사들이 일제로부터의 탄압이 심해지자 국내 활동이 어려워져, 중국 만주를 포함한 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나. 북한 정권의 탄압이 너무 심하다보니, 우리는 북한 내에서 반체제, 민주화 운동이 굉장히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제3국인 중국에 북한민주화운동의 기지를 건설해서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전개한 것이다.

Q.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에서는 적게는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이 굶어죽거나 혹은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럴 때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 김일성의 무덤을 하나의 거대한 궁전으로 만들고, 김일성의 시신을 미라 처리 하는 데 수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자행했다는 것을 보고,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5년에서 1996년경부터는 전북 지역에서 북한 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9년 6월 10일에 이민 가방 하나 들고 중국 심양으로 떠났다. 나는 당시 중국말도 할 줄 몰랐고, 중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고, 무엇보다 중국엔 북한민주화운동을 위한 아무런 기반도 없었다. 그렇게 떠나 13년 1개월 간 중국에서 체류하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증진과 북한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Q. 신념 하나로 젊은 나이에 이국땅을 밟은 건데, 그간 말 못할 역경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10여 년간 학생 운동을 할 때는 ‘이 사람이 스파이인가’ ‘이 사람이 나를 이용하기만 하면 어떡하나’ ‘이 사람이 나를 배신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탈북자들을 만나면 늘 그런 걱정을 해야 했다. 특히 ‘이 사람이 혹시 북한에서 보낸 스파이나 정보 요원이 아닐까’ 하는 긴장감을 항상 갖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불안감과 회의감, 의심을 갖고 살아야 했다. 이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다른 하나는 돈 문제였다. 한국에서는 신용카드도 쓸 수 있고 친인척에게 손도 벌릴 수 있지만 중국에서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인척이 전혀 없었다. 특히 1999년대부터 2001년까지는 중국 시스템 상 신용카드조차 발급받지 못했다. 그래서 당장 손에 현금이 없으면 활동가들이 최소한의 활동을 하는 것조차 정지될 수 있다는 위협에 늘 시달렸다. 그래서 우리의 생존과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



데일리NK와 인터뷰 중인 유재길 前 은평미래연대 대표(우) / 사진=데일리NK 


Q. 아무리 굳은 결의를 갖고 뭔가를 시작해도, 온갖 역경을 겪다보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긴 시간 동안 북한민주화운동을 포기하기 않고 버티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나?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초심, 둘째는 동지적 결속력, 그리고 셋째는 낙천성이다. 초심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가졌던 생각들, 즉 서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북한 주민들의 극악한 인권 탄압을 개선하는 데, 또 세습 독재 정권을 바꾸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는 뜻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의 생존의 의미와 자아실현을 이루겠다는 걸 되냈다.

동지적 결속력이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고생과 어려움을 함께 하겠다는 동지들에게서 느낀 감정이다. 진정한 인간적 관계의 최고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기꺼이 목숨도 대신 바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건 굉장한 힘을 준다. 그게 나를 버티게 한 원동력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낙천성도 큰 힘이 됐다. 내 외모가 냉정해 보이는지(웃음) 어떤 사람들은 나를 두고 ‘저 사람이 정말 낙천적일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뭔가 잘 안 되는 게 있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 찾으려 했다. 어쩔 수 없을 땐 즐기자는 것이지. 그런 마음가짐이 나를 지탱시키고 전진시키고,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게 했다.

Q. 북한민주화운동가들의 강한 의지와 헌신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을 말하는 게 다소 괴롭다. 지난 2012년 3월, 유 대표를 포함한 북한민주화운동가 네 명이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중국 국가안전부에 체포됐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나?

2012년 3월 29, 북한민주화운동의 주요 간부들이 중국 대련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이게 사전에 중국 안전부에 포착됐나보더라. 주요 간부 네 사람이 회합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각각 따로따로 안전부에 체포됐다. 30일 간 취조를 받고 84일간 간수소, 한국으로 치면 확정 판결을 받기 전에 머무는 구치소에 있었다. 중국에서 우리에게 건 죄목은 국가안전위해죄였다. 최저 형량이 징역 10년에서 최고는 사형까지 할 수 있는 무거운 죄였다.

그 근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들의 변경(국경)을 소란하게 하며 안정을 헤치는 활동을 했으므로 국가 안전을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국 공민을 위험에 처할 수 있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북한민주화운동을 할 때 중국 공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함께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중국 국적 동지들도 여럿 있었다. 그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경의 안전을 위협했고, 공민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국가안전위해죄를 건 것이다.

Q. 이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현재도 북한의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과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원칙적인 이야기부터 하면, 일단 김정은 정권이 핵실험을 하고 도발을 감행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응을 해야 한다. 도발을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고통뿐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국제적 공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마련해야 한다. 지금 대북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는데, 그런 걸 포함한 전면적인 심리전이라든지 김정은 정권이 아파하는 급소를 찔러야 한다.

한편으론 김정은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도한다면 적극 지지해야 한다. 지원도 해주고, 그래서 개혁개방을 이끌어내며 도발의 위협을 차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에게 물질적 식량뿐만 아니라 정신적 식량으로서의 정보를 다양하게 유입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 활동을 민간 차원에서 다양하게 펼칠 수 있도록 북한인권법이 하루 속히 제정돼야 한다고 본다.

Q. 화제를 바꿔 보겠다. 북한민주화와 정치는 다른 영역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유 대표가 제도권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북한민주화 운동가가 가진 강점 중에 한국정치를 잘해낼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은 뭐가 있나?

최근 새누리당에서 험지 출마론이 나오지 않았나. 흔히 말하는 386 운동권 세대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여의도를 향해 갈 때, 나는 그야말로 험지 중의 험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 갔다. 그런 험지에 가기 위해서는 뚜렷한 명분과 기치, 확신, 헌신, 희생정신 그리고 큰 용기가 필요하다. 북한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 등을 뿌리치고, 험지 중의 험지인 중국에 가서 활동했다. 그런 용기라든가 실천력, 추진력 등이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에 큰 우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Q. 그런 강점을 은평을에서 특히 잘 살리길 바란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유권자 분들에게 은평을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와 청사진을 제시해본다면?

은평을 지역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작년 초부터 1년 가까이 준비해왔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우선 은평이 변하고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인이 너무 오랫동안 정치해왔으니,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보다 젊고 새로운 사람이 정치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건 슬로건은 ‘40대 기수로 세대교체’ ‘세대교체를 통한 은평의 새 판 짜기’였다. 내가 은평의 새 판을 짜서 은평의 변화와 발전을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은평의 변화에 있어서 필요한 건 세 가지다. 첫째는 교통난 해소, 둘째는 주거환경 개선, 셋째는 상권의 활성화다. 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한 것도 이것들이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 중국에 갈 때 제 모든 것을 걸고 갔던 각오와 결심, 용기, 추진력을 은평의 새 판짜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다. 은평의 변화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걸 것을 약속드린다.

Q. 만약에 한 유권자가 대표에게 “운동권이 정치 잘할 수 있겠어?” 아니면 “중국에서 오랫동안 북한관련 활동한 사람이 은평을 대표해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겠어?” 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변을 하겠나?

운동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특히 나는 학생운동을 할 당시 4, 5년 간 목표나 방법에 있어 크게 오류가 있었다. 다만 그걸 깨달은 뒤에는 바로 용기 있게 반성을 했고, 잘못된 목표와 방법을 고쳐나가기 위해서 이후 4, 5년 간 한총련 개혁과 학생운동 혁신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우리가 한 활동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인정했고, 그것을 고치겠다는 다짐을 실천으로 옮겼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중국에 가서 13년 간 운동만 한 게 아니라, 인권운동을 위해 필요한 자금 조달도 했다. 당연히 돈도 빌리고 사업도 해봤지. 음식점 8개, PC방 2개, 무역회사 1개를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해봤다. 운동권 출신들에게 가장 많이 붙는 비판 중 하나가,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본 경험은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직접 돈도 벌어보고 실패와 성공을 다 겪어봤다. 그러한 현실감각과 경영 마인드는 내게 큰 자산이다. 운동권의 시각과 마인드를 탈피하기 위한 실천도 했고, 현실감각과 경영 마인드도 갖고 있기 때문에, 운동권이기 때문에 받는 오해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Q. 마지막 질문이다. 북한민주화운동가로서,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정치 신인으로서 은평을 주민뿐만 아니라 북한주민들에게 포부와 비전을 밝혀 달라.

내가 68년 원숭이 띠다. 원숭이의 해에 유재길이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북한인권 증진, 북한 민주화를 위해서 통일 시대를 준비하겠다. 그리고 은평의 새 판 짜기를 이루면서, 은평의 변화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 내가 1988년 의예과에 들어갔을 때, 서민들을 위해 슈바이처와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런 마음으로 은평 주민들과 서민들을 위해 늘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갖겠다. 중국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용기와 각오를 다시 다잡아 은평 주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은평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또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과 통일을 위해서 뚜벅뚜벅 한 걸음씩 걸어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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