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농촌동원령’에 5월 없었으면 좋겠다”

모내기 철인 5월 중순부터 6월까지는 북한 주민들이 1년 중 가장 바쁘게 보내는 시기다. 북한 당국은 식량 생산 증진을 위해 이 시기에 주민들을 농촌에 총동원하고 있다. 주민들은 “전당, 전군, 전민이 농촌지원하라”는 방침을 따라 소학교, 고등중학교부터 대학, 군인, 기업소, 여맹, 인민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가야 한다.

이 시기에는 당국이 시장 개장을 일과가 끝나는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만 할 수 있게 하거나 아예 제한을 하고 있어 하루 먹고사는 주민들에겐 고난의 연속이다.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들은 ‘농촌동원’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데일리NK는 학생, 군인, 기업소, 여맹 등에 있으면서 농촌지원에 동원됐던 적이 있는 탈북자들에게 그 실태에 대해 들어봤다.

◆황해남도에서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농촌지원에 동원됐던 탈북자 박동희(가명) 씨.

“소학교 3학년 때 수업 후 20리(8km)밖에 있는 농장 물주기 전투를 나갔었다. 큰 물통으로 몇 시간 동안 물을 긷다 보면 힘이 없어 자꾸 넘어져 흙투성이 된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잘 때 오줌을 싼 적도 있다. 중학교 4학년부터는 ‘식량정지증명서’를 발급받아 타 시, 군에 농촌동원을 나갔다. 한 학급 인원이 40명 정도로 4개 학급이 있었는데 모두 200명 정도가 한 작업반에 배치되었다.

농장원집 단칸방에서 숙박했는데 농장원 부부와 아이, 학생지원자 3명, 모두 6명이 함께 숙박했다. 옥수수밥 한 그릇을 먹고 논판에 들어설 때는 새벽에는 발이 시리고 오후부터는 허리가 아프거나 빈혈이 나 눈을 감고 한참 서 있곤 했다. 힘든 것보다 배고픔이 참기 힘들어 바람이 부는 날이면 떨어진 떫은 살구를 주워 먹느라고 살구나무 주위를 서성이곤 했다. 농촌지원에 동원된 학생들은 부모가 싸준 콩이나 옥수수, 펑펑이가루(옥수수 변성가루)를 간식으로 먹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간식을 싸오지 않는다. 여학생들은 그런대로 참았고 남학생들은 배고픔을 참다못해 작업반의 닭을 몰래 훔쳐 볏짚 불에 구워 먹곤했다.

다행히 농촌지원기간 내 생일이었는데 선생님이 이밥(쌀밥) 한 그릇과 계란 한 알을 삶아 주어 생일을 쇠 주었다. 학생 한 명이 하루 모 세 판을 뜨는 것이 정량이었지만 생일 날은 손에 자개바람이 일도록 다섯 판을 떠 밥값을 치렀다. 모내기는 이양기에 학생 두 명이 모춤(모가 묶인 것)을 넣는 일을 했는데 한 남학생이 기계에 손이 말려 손목을 절단하게 됐다. 농장관리위원회에서 TV 한 대를 주긴 했으나 그 학생은 끝내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른손이 절단 되어 글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촌동원을 추억하면 그 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북한에 있을 때 일 년 중 5월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평양 ‘평고 사령부’에서 군사복무 하면서 농촌지원에 동원됐던 한성(가명) 씨.

“나는 평양시에 있는 ‘평고 사령부’ 고사포중대에서 군 복무시절을 보냈다. 부대에서는 5월이 되면 허약자가 많은 중대를 농촌동원에 내보냈다. 농촌동원 나가면 강도 높은 군사훈련이 없고 민가와 농장에서 훔쳐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허약이 해결되는 동시에 탈영자 문제도 해결됐다.

중대인원 70명 중 10명만 부대에 남고 60명이 평양 주변 농장에서 두 달 동안 농촌 일을 하면서 영양보충을 했다. 군인들은 농장 선전실에서 숙박하면서 논두렁잡기, 볏모를 지게로 나르는 등 일판을 제끼기도 하여 군인지원자를 받은 농장 모내기 실적은 항상 좋았다. 농장관리위원회에서는 일 잘하는 군인지원자들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기도 했다.” 

◆평안북도 공장 노동자로 농촌동원에 참가했던 채혁(가명) 씨.

“기관 기업소 농촌동원은 5월 20일부터 본격적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5월 20일부터 6월 10일까지 단기간 농촌동원을 나갔지만 그 이후로는 공장 자재가 없어 7월 20일까지 농촌지원을 다녔다. 모내기전투, 김매기전투, 풀베기전투 등 북한은 전투라는 말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전투라는 것이 좀 웃기다. 

30리 밖에 있는 농장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데 자전거 있는 노동자는 그래도 9시에 도착할 수 있지만 걸어서 오는 노동자들은 10시 정도 농장에 도착한다. 걸어오는 데 힘이 빠진 노동자들은 일의 능률이 떨어진다. 그런대로 시간 채우다가 12시가 되면 점심밥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오후 일은 2시부터 시작해 5시면 끝나는데 노동자들의 농촌지원일은 정해진 도급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채우기이다. 그러나 기업소가 농촌동원하였다는 공수확인증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농촌지원공수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직장장은 농장 작업반장과 사업하여 허위로 된 계획공수를 받아가기도 한다.”

◆강원도에서 인민반장을 하면서 농촌동원에 참가했던 이선희(가명) 씨.

“북한 여맹은 5월 총동원 시기가 오면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5, 6월 농장일로 이곳저곳을 불려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농장관리위원회에서는 동사무소에 모내기를 비롯한 농사노력이 필요한 작업반 지역을 알려준다. 동사무소에서는 관리위원회의 연계 지시에 따라 산하조직인 각 인민반과 여맹조직에 농촌동원 조직사업을 지시한다.

여맹원들은 장마당 활동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농촌동원의 무보수노동은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다. 당의 방침이라 농촌동원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화만 오른다. 여맹원들은 어떻게서든 장마당 장사 시간을 얻으려고 농촌동원의 도급제를 원한다. 도급량은 한 여맹 초급단체에 주어진 일량에 따라 주어지는데 동원 나온 여맹원 수에 따라 도급 할당량이 달라진다. 

여맹에서는 나오지 않는 여맹원들에게 하루 옥수수 1kg의 값을 내도록 한다. 그 비용으로 농촌동원 나온 여맹원들의 간식이나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며 모내기가 끝나면 간단한 소회식을 하기도 한다. 도급제를 끝내고 여맹원들이 장마당에 나가려면 길거리에서 여맹규찰대가 단속한다. 총동원기간에 길거리로 다닌다는 자체가 농촌총동원 방침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때는 새벽에 나가 농촌지원도급제를 하고 왔다는 농촌지원확인서를 보여준다.

하루 여맹원이 농촌에서 일할 도급량은 모 한 판이 되기도 하고 두 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도급제도 농촌지원확인서도 소용없다. 종합시장 문이 저녁 5시부터 열리기 때문이다. 현명한 여성들은 자기 상품을 팔기 위해 집 문앞이나 지붕 위에 ‘신발’, ‘공업품’ 등 커다란 문구를 내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다. 원시적인 광고의 출현이다. 이것이 유행돼 농촌지원 기간이 되면 집집마다 혹은 길거리에 상품광고 문구를 들고 있는 여성들을 종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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