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들께 제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밖에 있는 수많은 분들이 북한에 계신 여러분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또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반(反)공화국 적대행위 혐의로 735일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배준호) 선교사가 지난 2일 데일리NK와 국민통일방송이 공동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북한 수감생활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전했다.
오래 전부터 한국 대북 민간방송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직접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면서 “방송을 통해 우리 모두가 북한 주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런 북한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는 배 선교사가 ‘국가전복음모죄’란 죄목으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북한에서 사사여행(친척방문)으로 중국에 나온 한 주민과의 만남을 통해 여행사 대표라는 신분으로 북한 선교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무런 문제없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2012년 단 한 번의 실수(북한 영상과 그동안의 활동이 담긴 외장하드 소지)로 북한 당국에게 신분이 발각, 호텔에서 체포당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정치범으로 몰려 억류당한 점이)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이곳(북한)에 보낸 것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소회했다.
이런 마음으로 배 선교사는 주(週) 6일 동안 돌을 나르는 등 중노동에도 꿋꿋이 견뎌냈다고 한다. 또한 이 와중에도 북한 간수(看守)들에게 귀감이 되기 위해 신앙과 나름의 선교활동도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수령절대주의, 주체사상으로 물들어 있는 간수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특히 북한 체제가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고 배 선교사는 전했다.
그는 “(UN 사무총장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모습에)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통제되고 단절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면서 외부 정보 유입이 북한 사회 변화에서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배 선교사는 이어 “하나의 통제된 매체를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선택해서 볼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이라면서 “자유롭게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북한 주민들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고, 삶도 풍족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북한 특별교화소에 있는 동안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부터 45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그는 “누군가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큰 힘과 용기가 됐다”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외부의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고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도 외부에 계신 많은 분들이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함께 나누길 원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을 위한 사랑의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해외동포들, 세계 사람들이 함께 화합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소망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마시고 소망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한편, 케네스 배 선교사의 인터뷰는 오늘(6일) 현충일 특집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송출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국민통일방송 홈페이지(http://www.i-ubs.org/korean/index.php)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케네스 배 선교사와의 인터뷰 전문]
-국민통일방송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이 방송을 듣고 계실 북한 청취자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케네스 배라고 합니다. 약 30여 년 전에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요, 중국과 북한에 계시는 분들께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선교 활동을 하다가 북한에 약 2년간 억류돼 있었습니다.
-억류되시기 전에 6년간 북한 선교활동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 선교를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고향이 평안북도 영변이었던 저희 아버지 영향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가족들이 모이면 평북도 사투리를 자주 썼는데, 사투리를 들으면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학교를 미국에서 다니고 있을 때, ‘고난의 행군’(대량아사시기)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북한에 계신 많은 분들이 힘들어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분들께 보탬이 되고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2005년도에 북한에서 사사여행(친척방문) 경로로 나오신 분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분들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굳건하셨고 그때(대량아사시기) 하나님을 처음 믿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께 하나님을 믿으니까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분들께서 ‘그동안 살 소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살아갈 소망이 생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분들에게도 하나님이 소망이구나. 이분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도울 수 없는 일이 없을까, 하나님을 그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길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 2012년 11월 전에 17번이나 북한에 들어가셨지만 억류되신 적은 없었습니다. 18번째 북한을 방문했을 때 억류가 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네, 관광 여행사(선교사란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를 운영했습니다. 여행사를 통해서 외부의 사람들을 북한에 데려가서 그곳의 자연환경 및 고유한 문화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18번째로 북한에 갔을 때 실수로 ‘컴퓨터 외장하드’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북한에 대한 실상을 밝힌 동영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외장하드가 검색에 걸려서 발각됐고, 결과적으로 제가 억류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외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당시 선교사님이 소지하셨던 선교 자료나 북한 관련 영상들은 위험한 것들이 아닙니다. 북한 당국은 왜 ‘반공화국 적대범죄행위’로 처벌을 했다고 보십니까?
외장하드에 들어있던 영상들은 서방 매체에서 북한을 취재한 것을 담은 것들이었습니다. 우선, 북한 당국은 영상이 서방사람들에게 북한에 대한 왜곡된 내용을 알릴 수 있는 불순자료라고 하면서 문제 삼았습니다. 또 무엇보다도 외장하드에는 6년간 중국과 북한에서 선교했던 활동을 담은 사진들도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제 신분이 선교사이고 북한에 (여행사 사장으로 온 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반(反)공화국 모략·적대적 행위라는 죄목을 씌운 것입니다.
-북한 당국이 선교사님께 적용한 죄는 정치범에 해당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정치범으로 몰려 예심을 받을 경우 보위부 지하 감방에 갇혀 각종 고문을 받게 됩니다. 예심 기간 동안 고문을 받으셨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며칠간 잠을 많이 안 재운다든지 하루 종일 방의 한 곳에 세워 놓거나, 무릎을 꿇려서 몇 시간 앉혀 놓는 등의 처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혹한 인권유린이라고 할 수 있는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고문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억류당했을 때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관광 여행사를 통해 많은 외부 사람들을 북한에 데리고 가서 북에 계신 주민들을 만나고 하면서 북한 분들에게 마음도 얻게 되었습니다. 또 북한 경제에 이바지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수감이 됐고,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 받게 되면서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억류된 사실을 탓하기 보다는,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북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저의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 충실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정치범으로 몰린 북한 주민들은 예심을 받는 동안 가족들에게 소재를 알리지 않습니다. 사실상 행방불명 상태가 되는데요, 예심기간에 선교사님이 북한에 억류돼 있다는 사실이 가족들에게 전달이 됐나요?
처음 한 달 동안은 아무런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평양으로 이송돼서 예심 과정을 거칠 때, (북한 당국이) 편지 보내는 걸 허락해줘서 가족들에게 억류 사실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대신해서 미국 정부가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도록 북한 당국이 편지와 한 두 번의 전화 통화도 허락했었습니다. 대신, 편지 내용이나 통화할 때는 써야 할 내용을 알려주면서 ‘미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쓰게 하고 개인적인 내용과 배합해서 편지를 보내게 했습니다.
-북한의 사법체계를 직접 체험하셨는데,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느끼셨나요?
미국의 사법체제는 특별하게 법정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상세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좀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심과정이라는 것을 거쳤지만, 그 이후에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미국 같은 경우엔 처음 조사 받는 과정에도 변호사가 입회를 해서 조사과정을 같이 하고, 질의응답을 하면서 변호를 준비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언제냐고 물었는데, 재판 당일 법정에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고 스스로 변호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서방 세계에선 보통 심리를 다루는 시간이 며칠에서 몇 달가량, 그러니까 꽤 오래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에선 딱 한 번의 재판에서 그것도 약 한 시간 반 만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걸 보면서 의문을 가졌습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의 노동교화소로 보내진 최초의 미국인이 됐습니다. 외국인 특별교화소에 수감된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외국인 특별교화소였다는 것은 북한 당국자에게 들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처음에 교화소에 가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일반 주민들이 가는 교화소로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외국인 특별교화소라고 했고, 생각했던 일반 교화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교화소였습니다.
-교화소 위치가 기억나십니까? 혹시 주변 풍경이 어땠는지 기억나시나요?
평양 외각에 있었습니다. 이송되는 도중에는 창문이 다 가려져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평양 중심에서 2~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풍경은 가는 동안, 창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북한 교화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보통 멀건 국과 강냉이쌀(옥수수 알을 쪼개서 쌀처럼 만든 것)을 먹기 때문에 영양실조로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사례들이 빈번합니다. 선교사님께 식사가 세 끼 모두 공급됐는지, 양은 얼마나 됐고, 어떤 반찬들이 제공됐는지 궁금합니다.
북한 간수들이 북한 주민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세끼 식사가 제공 됐습니다. 두 끼는 밥이 나왔고 한 끼는 강냉이 국수가 나왔었습니다. 특히 첫 두 달 동안은 반찬도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선도 나오고 돼지고기, 계란도 조금씩은 나왔는데, 나름대로 교화소에서 미국 시민이라고 배려를 해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그때는 부식물이 마땅치 않았는지 두세 가지의 짠지, 그리고 밥과 국을 줬습니다. 이후로는 교화소 음식이 많이 열악해졌고, 일하는 것에 비해서 음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체중감량이 많이 있게 됐습니다. 실제로 체중이 27kg 정도 빠지기도 했습니다.
-아픈 곳은 없으셨나요?
원래 지병이 있었습니다. 손 쪽에 문제가 있었고, 허리 쪽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질병도 좀 있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생활이 꽤 어려웠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영양실조 진단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습니다. 병원은 외국인 특별 병원이여서 시설이 나쁘지 않았고 거기서 외국인들에게 주는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치료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건 없었고, 그냥 안정할 수 있도록 영양주사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정치범이 되면 완전통제구역에 갇혀 평생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선교사님은 외국인으로서는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갇혀 있었지만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미국정부와의 협상 카드로 생각했기 때문에 풀려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 북한에서 했던 행동들을 인정했던 까닭은 당국이 시인하고 인정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회유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지내다 보니, 아무리 인정을 하고 사죄를 한다 하더라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북한 당국이 송환 여부는 결국 ‘미국정부 하기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저를 북한 당국이 미국과 협상을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카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교화소 안에서 기도를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교화소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중 하나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말 성경과 영어로 쓰인 성경도 가지고 있을 수 있었고, 찬양집도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찬양하고 말씀보고 기도하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지냈습니다. 간수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선교사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란 것을, 제 삶을 통해서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간수들이 ‘기도하면 뭐가 좀 생기냐, 하나님 믿으면 뭐가 좋냐’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외국인 특별교화소에 간수가 30여 명 정도 있었다고 하셨는데, 간수와 선교사님 사이에 벽이 있다고 느꼈습니까?
네. 그곳에 사시는 분들은, 대부분 외부 세계의 사람들과 달리 별개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대화에도 벽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야기 한 것을 그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들이 이야기 한 것을 제가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북한에는 수령절대주의, 김일성주의와 주체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무장되신 분들하고 얘기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서로 간의 마음이 열리고 또한 진심어린 대화들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어느 정도 벽이 허물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간수가 있으신가요?
네, 많은 분들이 기억나지만 특히 그 중에 기억나는 분이 있습니다. 굉장히 고지식한 분이었습니다. 일을 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부분에 관해서 지적하시고 무엇이든지 본인의 기준에 맞춰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항상 이야기 하던 분이었습니다. 또한 그 분은 굉장히 자신감이 많은 분이셨는데, 북한의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어느 국가랑 싸워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늘 저를 힘들게 하던 그 분이 몇 달이 지난 후부터 우호적으로 잘해주셨습니다. 제가 미국의 정보기관 사람이 아니고 또한 북한을 뒤집어엎으려고 했던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선교사였던 것을 알고는 잘해주셨습니다. 또한 헤어질 때는 ‘이렇게 안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가서 식사도 같이하고 술도 한 잔 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간수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셨나요?
간수들 뿐만 아니라 많은 북한 주민들이 당국에 의해 통제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간수 분들은 외부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깜짝 놀랐고 ‘믿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가지 예로 UN 사무총장을 하고 계시는 분이 한국의 반기문 씨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믿을 수 없다. 어떻게 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한 남조선 사람이 UN 사무총장이 될 수 있느냐, 이건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의 40배 정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한국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 겨우 1% 정도 되는 사람이나 잘 살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등의 반응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서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통제되고 단절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외부정보유입이 중요하겠다는 생각도 하셨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외부 세계에 사시는 분들이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자유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알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하나의 통제된 매체를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스스로 선택해서 볼 수 있고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북한을 제외한 대부분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삶인데, 북한에선 이렇게 평범한 것도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자유롭게 보고 들을 수 있다면 그분들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고, 또 그분들의 삶도 달라지고 풍족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시다가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억류됐습니다. 이후 북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거나 하지는 않으셨나요?
특별히 부정적으로 바뀐 것은 없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억류돼있던 745일 동안 북쪽에 있는 분들과 함께 생활을 했고, 이를 통해 북한 실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북한 분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힘든 과정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모습들도 봤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당과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는 의미 안에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좀 더 그분들께 가까이 가게 됐습니다. 언젠가 남과 북이 통일이 됐을 때 우리가 같이 살 수 있고 겨레가 함께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관심과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억류 경험을 통해서 오히려 선교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생기신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북에 계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그분들을 사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알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북에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도 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교화소에 있을 때 북한 간부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빨리 보내주시면 빨리 돌아오고 싶습니다. 돌아왔을 때, 북한 정권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니고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고 말을 했습니다. 또한 지금 한국에는 북한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탈북한 북한 동포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사랑의 통로가 돼서, 용기를 잃지 않고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끝으로 국민통일방송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전해주세요.
2년 동안 교화소에 있으면서 세계 각국에 있는 분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약 450통 정도의 편지였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분들이 저를 기억해 주고 있고 잊지 않고 있다. 또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큰 힘과 용기가 됐습니다.
다시 자유세계로 돌아왔을 때,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면서 환영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 하셨던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저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북한 주민들께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한 밖의 외부의 사람들이 북한에 계신 청취자들, 북한 주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고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도 외부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상황을 함께 나누길 원하고 있고, 북한에 관심을 갖고 여러분들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북한 주민들을 위한 사랑의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해외동포들, 세계 사람들이 함께 화합하고 화평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길 소망합니다.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마시고 소망을 잃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밖에 있는 수많은 분들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걱정하고,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