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경제개혁 불신은 7·1조치 후유증 때문

김정은 시대 들어 첫 경제개선 조치인 ‘6·28방침’의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기대감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주 북한 시장 물가와 환율이 급등한 것도 경제조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10년 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시행 당시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7·1조치의 확대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6·28방침에 대해 주민들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에 대해 함경북도 청진에 거주하는 노동자 김철민(가명) 씨는 “7.1조치 당시 자율성을 확대해 중국과의 합작이 늘고 봉사소를 늘려 살림살이가 좋아졌지만 3년 만에 모든 조치를 원상 복귀시켰다”면서 “당시 기업 상점과 봉사소가 모두 폐쇄됐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7·1조치 시행 1년 전인 2001년 10월 3일 당 경제일꾼들과의 담화에서 ‘강성대국 건설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경제관리를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방침을 발표했다. 김정일은 그 해 1월 중국 상하이(上海)를 방문하면서 ‘천지개벽했다’는 언급을 한 뒤 돌아와 10개월 만에 이 담화를 내놓고, 2002년 7.1조치를 발표해 개혁 조치를 구체화 시켰다.


7·1조치가 본격 시행 전까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인민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최대로 발양시키는 획기적인 조치’라는 교양이 계속됐다. 6•28방침도 일부 제도 변화에 대한 언급은 되지만 개괄적인 내용은 아직 하달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6·28방침은 7·1조치 발표에 비해 일부 진전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채산제 대상 공장·기업소는 국가가 따로 생산계획이나 품목을 정해주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산과 판매를 하고 가격도 결정권도 부여했다. 또한 주민배급도 공장이 책임지도록 했는데 6.28방침이 월급제를 실시하는 점이 다르다.


이번 6·28방침이 7·1조치와 뚜렷한 차이라면 농촌에서 분조(分組)의 수확량을 명시적으로 국가와 개인이 7:3으로 나눠 갖도록 보장했다는 점이다. 7·1조치 때는 ‘초과생산물을 자율적으로 처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공장·기업소가 매월 성과를 챙기는 것과 달리 농촌의 경우 연말 최종적인 생산물을 분배되는 방식이다 보니 동기유발이 부족했다.


7.1조치 초기에는 눈에 띄는 성과보다는 혼란이 많았다. 독립채산제 방식으로 공장·기업소가 운영돼 지배인의 권한을 확대하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공장·기업소 지배인의 권한으로 노동자 고용부터 생산·판매가 진행되고, 수익에 따라 노동자 임금과 배급을 보장하니 공장 운영에 활력이 솟았다.


도급제(都給制)와 성과급제(成果給制) 운영방식도 생산성을 일부 높였다. 생산성인 높아진 공장 노동자들의 출근은 100%에 가까웠다. 7·1조치로 공장·기업소가 운영할 수 있는 판매소와 봉사소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또 개인들도 거리 (판)매대를 세우고 이곳에 간이 봉사소를 운영하며 음식과 생필품을 팔았다. 인민보안성(지금의 인민보안부), 인민무력부 등 당 및 국가기관들도 봉사소, 판매소, 식당 등을 운영했다.


이러한 변화가 개별 기업들의 조건과 능력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에 수혜 기업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장기 침체에 있던 북한 민간경제에 이러한 변화는 큰 활력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혜산 출신 탈북자 이철호(43) 씨는 “하루 밤 자고 나면 새로운 간판이 몇 개가 걸릴 만큼 도시 전체가 활력이 있었다”면서 “평양과 지방 도시에서는 ‘돈주(錢主)’를 끌어들여 공장의 일부분을 복구해 소규모 생산을 진행했고, 국가 기존 건물과 신축 건물을 이용한 상점, 봉사소, 판매소, 식당, 음식점, 이동식 매점뿐만 아니라 가라오케, 당구장, 탁구장 등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 탈북자는 “더 나아가 안마, 미용, 한증사우나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까지 경쟁적으로 생겨났다”면서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자 주민들의 생활은 휠씬 편리해 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간부들과 외화벌이 업자들이 이용하던 외화상점, 식당은 쇠퇴해 점차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또 경제 활성화는 자연스럽게 북중 무역을 활발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북한은 대외물자교류시장을 허용해 무역권한을 시·군 기업소까지 확대했다. 중국으로부터 기술, 설비, 자재, 원료 구입 명목의 대방(무역상)거래를 승인하고 합영, 합작을 위한 투자는 수용했다. 각종 무역회사, 지사, 수출원천가공사업소, 기지 형태의 크고 작은 무역기관이 수천 개로 불어난 것도 이 시기로 이는 곧 북한의 돈주’가 늘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경제, 무역 활성화는 연쇄적으로 시장(장마당) 활성화라는 선(先)순환 구조로 이어졌다. 물가가 폭등하긴 했지만 장사를 통해 일자리나 돈을 벌 기회는 많아졌다. 김정일은 당시 평성시장 상황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저 소파는 내 방에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는 후문도 있다.


이처럼 7·1조치가 주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당국은 2005년 4월 25일을 기점으로 봉사소, 판매소 등 모든 상업시설을 강제로 폐쇄했다. 사회주의 경제 원칙에 벗어난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국가에 등록된 건물과 설비 등 재산은 모두 압수 조치됐고, 인민보안성 소속 노동자순찰대는 해머로 상점 간판 등을 부셨다.


당국의 급작스런 조치로 투자금 등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일반 주민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북한은 화폐개혁을 통해 물가를 잡고 노동자 농민들의 월급을 인상해준다고 강조했지만 결국 주민 재산 강탈과 물가 폭등만 낳았다. 현재 주민들이 6·28방침을 경계하는 것은 7·1조치와 화폐개혁으로 각인된 학습효과 탓으로 볼 수 있다.


주민들은 북한 당국의 방침에 대해 “살찌워 잡아 먹는다”는 말에 비유한다. 주민들이 투자와 생산을 늘려 경기가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면 당국이 사회주의 강화를 명분으로 통제를 강화하고 재산을 강제로 회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