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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주민들이 어려운 생활에 지쳐가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만난 북한주민들은 한결같이 “이젠 정말 개혁개방 하지 않으면 살아갈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삶에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해 10월 북한당국은 배급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세계식량기구(WFP)에 식량지원중단을 요구했고, 평양에 상주했던 세계 NGO구호단체들에 대한 철수명령도 내렸다.
그러나 중국으로 나온 북한주민들은 말로만 배급한다고 떠들 뿐,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1월 초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허룽(和龍)에 온 북한주민 허철민(무산광산, 36세)씨는“10월부터 배급을 준다고 했지만 11월에 강냉이 9kg밖에 타지 못했다”고 말했다. 광산에서 직접공(중노동)으로 일하는 허씨가 규정대로 받자면 하루 900g씩 한 달에 27kg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 달에 열흘 분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지난해 농사제일주의 구호를 걸었고 농업주공전선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허씨는 북한당국이 오로지 주민들을 정권에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 배급제를 실시했다고 말한다. 북한주민들도 이제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허씨와의 대화
– 올해 무산광산의 배급상황은 어떤가?
10월10일 명절을 맞으며 직장에서 식량카드를 만들라고 했다. 농사가 잘돼 배급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11월에 열흘 분, 12월에는 배급소에 쌀이 모자라 자꾸 기다리라고 했다. 배급 준다고 해서 직장에 나가던 사람들이 쌀을 안주자 또 수군거린다. 이번에도 ‘말 배급’만 타먹게 됐다고…
– ‘말 배급’이라니?
주겠다고 하고 말로만 때운다는 소리다. 주민들은 하도 속아서 이젠 믿지 않는다.
– 주민통제는 심한가?
보안서에서 주민들에게 직장에 나가라고 한다. 인민반에서 식구조사를 하고 노는 사람들을 신고한다. 차라리 집에서 없어지는 편이 더 낫다. 직장에 이틀만 안 나가도 광산규찰대에서 데리러 온다. 노는 사람들을 단속해 단련대에 데려다 노동시킨다. 죽을 먹어도 출근하라고 한다.
– 무산광산에서 얼마나 일했나?
광산에서 18년 동안 일했다. 노동력이 없어 중학교를 졸업하자, 당국이 집단진출 시켰다. 내 동창들은 군대에 한 사람도 가지 못했다. 94년부터 노임(월급)이 완전히 나오지 않았다. 97년까지 풀을 뜯어먹고 살아왔다. 98년부터 사람들이 장사하기 시작해 겨우 살아남았다.
– 지난해에 농사가 잘 된 것은 사실인가?
나는 직장 다녀서 잘은 모른다. 작년에 ‘농사제일주의’ 방침이 내려와 집에서 놀지 못하게 했다. 장사 다니는 사람들도 일 시켰다. 통행증이 없어 사람들이 ‘차 잡이’(차를 빌려타고)로 장사했는데, 보안서 규찰대들이 도로를 지키고 단속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끌어다 밭에서 김을 매게 했다.
– 7.1경제관리조치 이후 살기가 어떤가?
2002년에 ‘7.1 경제관리조치’가 나온 직후에는 노임이 올라 좋아했다. 나는 4급 기능공이어서 한 달에 2,500원을 탔다. 6급 기능공들은 4,500원씩 탔다. 처음에는 기뻤다. 그런데 두 달도 못돼 물건값이 50배 이상 뛰었다.
70원 하던 쌀이 쭉쭉 올라가더니 1,200원까지 올랐다. 강냉이도 마찬가지다. 고기 한번 먹자면 2천원은 줘야 한다. 노임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밀린 노임은 저금했다고 치라고 하고 쪽지만 한 장 준다. 생산이 되면 나중에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받지 못했다. 노임에서 인민군대 지원, 인체보험(건강보험)을 떼내면 사실상 빈털터리다. 장사를 하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되어있다.
– 한국에서 준 쌀을 먹어 보았나?
청진항에 들어온 ‘대한민국’이라고 쓴 쌀 포대를 보았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그림의 떡이다. 사흘만에 군대들이 다 가져갔다. 그날은 청진 장마당이 쌀 천지다. 장마당 쌀값이 뚝 떨어지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쌀을 마구 사들인다. 비쌀 때 팔려고 하는 것이다.
허철민씨는 “이젠 사람들이 왜 못사는지를 다들 안다”며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젠 제발 좀 개혁 개방했으면 좋겠다고 내놓고 말한다”고 전했다.
중국 허룽(和龍)= 김영진 특파원kyj@dailynk.com
한영진 기자(평양출신 2002년 입국) hy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