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고위관계자와 여권은 21일 일제히 미국을 향해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으로 북한을 자극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발언은 6.17 회담 이후 최근 미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잇따라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표현한 것에 따른 대응 차원이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최성(열린당) 의원은 “라이스 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발언은 북핵 국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부시가 진정 북핵 해결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정부가 북한이 (내세운)명분론에 끌려다녀선 안되고 북한의 대변인처럼 하면 안된다”고 우려했다.
폴라 도브리안스키 미 국무부 차관은 20일(현지시간) 허드슨 연구소 주최 세미나에서 북한을 미얀마, 짐바브웨, 쿠바와 함께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했다.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고위 관계자가 미국이 당분간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 발언을 취소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한 시점과 비슷하다.
미 행정부, 대북비판은 ‘있는 그대로’의 해석
하루 앞서 라이스 장관도 한 방송에 출연해 ‘북한이 폭정의 전초기지가 맞느냐’는 질문에 ‘북한 정권의 성격은 자명하다’고 말했다.
라이스 장관은 이날 북한이 미국 관리들의 대북 비판 발언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6자회담 불참에 대한 핑계를 찾으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번 도브리안스키 차관의 발언이 북한을 자극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 장관은 21일 오후 해외 출국에 앞서 “라이스 장관에게 이같은(발언자제) 입장을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미 최고위 관계자들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인민을 굶주리고 핵을 개발하는 무책임한 지도자’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지도자” 라는 표현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했다. 조셉 디트러니 북핵 특사는 14일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이 핵만 포기하면 항구적인 안전보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정치적 해석이 아닌 독재국가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반영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표현은 미국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인식하는 핵심 키워드로 볼 수 있다”면서 “대북 인식의 문제이지, 체제나 제도를 인정하는지 여부와 관계가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사과는 안 하겠지만 발언자제 수용가능”
미 행정부 관계자들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은 대부분 기자나 의원이 북한 사회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이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미 행정부에 대해 북한에 대한 평가 자제를 요구하는 것이 외교적 설득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남 교수는 “당분간 미국이 ‘6자회담 복귀’를 위해 이에 대한 사과를 하지는 않겠지만 발언은 자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은 북한에게 필요한 것은 분위기 조성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복귀조건을 제시해 6자회담을 회피하려는 핑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6자회담 당사국 간에 심각한 내부 균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북한이 남∙북∙중∙러 와 미∙일이 맞서는 구도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또한, 한국과 중국이 북한의 방패막이로 활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북한이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 여부를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두 가지 의도가 있어 보인다. 김 위원장이 ‘미국이 북한을 업수이 여겨 자위적 차원에서 맞서야겠다’는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체제 위협론의 선전 차원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미국이 여기에 쉽게 응할 수 없다는 점에 천착, 한∙미간 공조를 깨트리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북핵 대응에서 무엇보다 북한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원칙적인 대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는 지난 4월 ‘폭정의 전초기지 사과 요구는 북한 주권국가 인정 발언으로 충분한 해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폭정의 전초기지’ 언급 자제 요구가 한∙미간 북핵 공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