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지난 3월 29일 중국 공안에 체포된 김영환 위원의 구금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고 5월 중순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체포에 대항하여 묵비권을 행사하는 동안 중국 공안당국으로부터 심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었다. 2008년 전 세계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올림픽이 열린 나라,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이른바 ‘평화굴기(平和堀起)’를 내세우는 나라, 대국의 패권주의를 지양(止揚)하고 있음을 천명, 재천명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평화의 이면에는 자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인민에 대한 광범위한 인권유린과 자의적 폭치(暴治), 티베트인과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잔학무도한 탄압, 통치자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날조, 왜곡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중국 역사학과 東北工程, 이미 15,000명을 학살하고도 권력을 놓지 않고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에 대한 중국정부의 집요한 지지…, 일반 불교신도대회에 티베트 신도대표가 참여하였다고 해서 난동을 피우며 퇴장을 요구하는 중국 참가자들의 오만 방자, 분명한 것은 이때 중국이 원하고 편하게 느끼는 질서를 평화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화주의(中華主義)라는 패권주의를 평화주의로 재포장 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아직 아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중국이 패권주의 국가라는 점을 확인하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중국 공안에 의해 극심한 고초를 겪은 김영환 위원은 중국이 특별히 다른 서방국가에 비해서 패권주의 외교정책을 선택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중국을 매우 우호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한 대국이 패권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국의 패권주의 성향은 대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국가체제로서,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조약과 국제여론을 통해서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바꿔 말해 중국 내부에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은 대외적으로 언제라도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폭군적 패권주의로 나타날 수 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서도 새기 마련이다.
여기서 4강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위해 한국이 어떤 ‘대국’과 손을 잡아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그것은 우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대내적으로 다져온 전통이 있는 나라여야 한다. 한 마디로 미국이다. 설사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고 해서, 대내적으로 인권유린이 발생한다고 해서 미국과 중국이 같은 부류의 나라는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전통이 이런 패권주의 행태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타나모 전범재판과 관련된 인권유린에 대하여 유엔뿐 아니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부시 대통령이 만든 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게 한 것과 관련, “군사위원회는 미국법이나 제네바 협약 하에서 그러한 권한을 가질 수 없다”며 5대3으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중국 재판정에서 이런 판결은 무망(無望)하다.
II.
한국인이 패권주의 중국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은 소국이 소국답게 대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방식을 취해 왔고, 경제력 10위권의 대한민국도 조선의 사대주의 외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 신라 시대에는 뭘 믿고 그랬는지 패권주의 중국에 대항하였고, 비록 냉전시대였지만 한국전쟁 시에는 ‘중공군’에 대항하여 한 뼘의 땅을 놓고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벌이며 싸웠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DNA가 한국인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과 국교 정상화 20주년인 올 해, 외국인을 사실상 불법체포하여 고문을 자행한 바로 중국 공안당국의 책임자, 즉 스파이 두목이 한국을 방문하여 경찰과 국정원의 책임자를 두루 만나고, 외교통상부 장관은 물론 대통령과 면담하며 희희낙락하는 언론 보도를 보면, ‘국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국 앞에 쪼그라드는 한국 정부의 깊은 고뇌’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그 국익이 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 하면서 양국 간의 선린관계 구축을 위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서로 많은 교류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한중간의 무역은 급격히 늘어 이제는 한국 최대의 무역국이 중국이 되었다. 또 한국의 드라마는 중국인을 사로잡아 중국을 여행하고 온 지인들은 이구동성 중국으로 가기 전에 한국 드라마의 줄거리라도 대충 외우고 가라고 충고한다. 평균이하이거나 한국 드라마를 모르면 가짜 한국남자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류열풍은 성형열풍으로 번져 심지어 중국의 중소 도시에까지 ‘한국의 성형의사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서 한국으로 갈 필요 없다’는 광고가 걸려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지금쯤 한중간의 선린관계도 1등은 아니더라도 2등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있다. 차라리 중국과의 교류 관계로부터 얻은 그 수많은 유형무형의 가치, 한 마디로 돈을 잃지 않으려고 중국의 패권주의 앞에서 한국은 내적 독백만을 읊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과의 선린관계를 더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이해관계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라도 한중FTA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난 20년간의 대중관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다시 성찰해야 한다. 물론 한중 간의 친선관계가 증대되는 측면이 적지 않겠지만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한중FTA를 통해 한국은 중국을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사대주의로 모실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남북한을 모두 좌지우지 할 수 있다면 중국이 왜 북한을 버리고 한국을 택하겠는가? 특히 한국은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하고, 종북 보다 종미를 더 혐오하는 좌파들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III.
우리는 이번 김영환 위원의 불법체포 가학행위에 대하여 시민단체뿐 아니라 정부도 집요하게 중국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 중국은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한 국가이고, 만일 유엔에서 중국의 고문실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결코 김영환 위원 1인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북한의 보위부가 개입된 것이 거의 확실해진 지금, 한국의 주적국가의 첩보기관과 협조하여 한국 국민에게 불법적 위해를 가한 나라와 선린증대를 논하는 것은 정치적 매조키스트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체에 고문흔적이 사라져 증거가 없으니 중국정부에 항의할 수 없다는 정부 당국의 주장은, 중국의 공안당국 책임자와 말을 맞춘 것인지 모르겠지만, 무책임한 궤변에 불과하다. 중국정부는 김영환 위원을 체포하여 114일 동안 구금하고 심문은 하였으나 결코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로 체포되었는지 결코 밝히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밝힐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에 무엇을 했다는 것인가? 김 위원이 산보와 사색으로 소일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인가? 조사해도 아무런 불법행위를 밝히지 못했다면 빨리 석방해야 옳은 것이다.
또한 왜 그렇게 오랜 시간 영사접견을 거부했으며, 왜 이렇게 오랜 시간 구금을 하다가 중국의 공안부장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그를 석방하게 되었는가? 분명 범죄행위가 있었으나 이들을 정식으로 기소하자니 한중간의 우호, 선린관계에 해가 될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느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우물거리며 보냈는가? 모두 소설 같은 이야기다.
결론은 돌직구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다. 아무 혐의점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김영환 위원을 그렇게 오랜 시간 구금하였다는 것 자체가 뒤집을 수 없는 가혹행위의 증거이다. 즉 가혹행위의 증거가 사라지기 기다리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며, 가혹행위에 대하여 발설하지 말도록 김위원을 회유, 협박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일관성 있는 스토리텔링도 불가능하다. 중국정부는 스스로 지울 수 없는 증거를 남겼다. 한국정부는 이점을 물고 늘어져야 하며, 시민단체 역시 국제기관에 이점을 갖고 중국의 인권유린에 항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김영환 위원이 불법체포된 후에 공개적, 공식적으로 중국에 항의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는 점이다. 김위원은 체포 후에 묵비권을 행사하였고 바로 이 기간에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만일 김위원의 체포 이후 곧바로 영사접견권의 제한에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공개적으로 중국 공안당국의 행태를 비판하였다면 김위원의 고통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고, 그 후유증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한 시간 역시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대국공포증, 중국포비아의 냄새가 짙게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