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우라늄 진실게임’ 재연..결과 주목

2002년 10월4일,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 특사 일행은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만나 ‘HEU(고농축우라늄)’ 의혹을 공식 제기했다.

그 자리에서 강석주는 “우리가 HEU 계획을 갖고 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HEU 계획을 추진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있다”고 맞받았다는게 당시 상황에 정통한 외교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일각에서는 “우리는 핵무기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있다”고 강석주의 발언을 전하기도 한다.

표현방식은 다소 틀리지만 어쨌든 강석주는 이 발언을 하기에 앞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당과 정부를 대표”해 그 ‘총의’를 전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켈리 차관보 일행은 전날(3일)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만나 HEU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미측 정보를 전하고 이는 제네바 합의에 대한 심각한 위반임을 지적했다.

김계관 부상은 “그같은 계획은 존재하지 않으며 적대세력의 날조”라고 일축하며 증거제시를 요구했다.

그런데 하루만에 ‘공화국의 당과 정부’를 대표하는 강석주는 다른 말을 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동안 켈리 차관보 일행의 방북 결과를 대외보안 사항으로 유지하다 결국 그달 16일 국무부 대변인 긴급성명 형식으로 ‘켈리 방북단은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북한에 전했으며 북한측은 그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음을 시인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측은 한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9일 후인 10월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명시적으로 부인하지도, 그렇다고 시인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거의 4개월이 지난 2003년 1월29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그(켈리)의 말에 대해 인정할 것도 없었고 부정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밝힌 데 이어 1월30일에는 리 철 주제네바 북한대사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농축우라늄 계획을 시인한 일이 없음을 명백히 한다”고 명시적으로 부인했다.

HEU 파문 속에 클린턴 행정부와 북한이 합의한 ‘제네바 체제’는 무력화됐고 한동안의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협상인 ‘북핵 6자회담’이 2003년 8월 이후 현재까지 유지돼오고 있다.

특히 북한은 6자회담이 진행되는 5년 이상의 세월 동안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극력 부인해왔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 정책을 총괄 지휘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국내에서 ‘네오콘(신보수주의자) 음모설’이 제기됐다.

부시 미 행정부 출범 초기 워싱턴의 정보를 장악했던 강경 네오콘 세력들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UEP)’과 관련된 북한의 움직임을 ‘실체적 위기’로 포장해 의도적으로 과장함으로써 당시 동북아 화해 협력무드를 차단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 미국내에서도 네오콘 세력들이 퇴조하고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중심으로 한 대북 협상파들이 주도권을 잡은 상황에서 HEU 프로그램과 관련된 구체적 증거가 나오지 않자 핵무기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 ‘HEU’라는 용어대신 전반적인 우라늄농축을 의미하는 ‘UEP’라는 용어가 더 자주 사용됐다.

이를 두고 미국 정보 당국의 HEU 정보 판단이 의도적으로 과장됐을 가능성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돌았다.

그러나 미국내 보수주의 세력 뿐 아니라 한국 정부 일각에서조차 북한이 노후한 영변 핵시설(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용)을 불능화하거나 폐기하는 대신 은닉하기 쉽고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되며 핵이전이 용이한 ‘HEU 프로그램’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 군 당국은 2005년 9월 국회 국방위 비공개 보고에서 북한이 우라늄농축시설을 건설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터에 북한이 지난 1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안보리의 대북 결의 1874호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우라늄농축 작업 착수를 선언하자 “그동안 북한에 철저하게 농락당한 꼴이 아니냐”는 지적이 외교가에 확산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북한의 HEU 추진가능성을 지적해온 정부 고위 소식통은 15일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은 90년대 후반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들여온 20여기의 원심분리기나 러시아측으로부터 밀수한 150t의 고강도 알루미늄의 실체를 봐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HEU 프로그램 추진 의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상식적인게 아니냐”고 말했다.

만일 북한 외무성의 13일 성명이 HEU 프로그램 추진을 공식 시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북한은 클린턴 정부와의 제네바 합의를 몰래 위반하면서 비밀리에 새로운 핵개발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한 것이 된다.

하지만 북한의 성명 내용이 ‘우라늄농축 작업 착수’ 선언이고 그들 스스로 “자체의 경수로 건설이 결정된데 따라 핵연료 보장을 위한 우라늄 농축 기술개발이 성과적으로 진행돼 시험단계에 들어섰다”고 한 만큼 HEU 단계로 비약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HEU 프로그램 추진 가능성을 낮게 보는 전직 고위 관료는 “우라늄을 저농축 단계에서 고농축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면서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HEU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북한이 더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새로운 ‘우라늄 진실게임’이 시작된 셈이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위협의 수준을 높이고 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압박도 갈수록 강도를 더하고 있는 만큼 진실게임의 향배도 이 과정에서 방향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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