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남 피살에 연루된 북한 국적 용의자가 최소 5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소위 ‘암살조’ 형태로 구성됐던 이들이 각각 어떤 역할을 부여 받아 파견됐는지 관심이 모아진다.
현재까지 나온 용의자 진술 및 참고인 증언, 현지 보도 등을 종합해 볼 때, 북한 국적 용의자들은 각각 현지 여성 용의자들 포섭부터 범행 현장 탈출 보조, 암살 작전 총책 등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범행 당시 공항 근처서 상황을 주시했던 것으로 확인된 북한 국적 남성 용의자 4명 중에는 암살 작전 총책 외에 전문 살인조인 ‘극단 행동대’가 포함됐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정남에 직접 독극물 공격을 한 여성들이 암살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긴급 투입될 암살조가 현장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관측이다.
북한 정찰총국서 25년간 근무한 장교 출신 탈북민 A 씨는 20일 데일리NK에 “암살 사건 당일 북한으로 돌아간 4명의 암살조가 작전 주도자”라면서 “이들 중 50대 남성 2명은 이번 ‘암살 작전’ 진행 총책이고, 30대 청장년 2명은 불의의 상황 또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극단 행동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이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 국적 용의자 중 리지현(32)과 홍송학(34)은 30대, 오종길(55)와 리재남(57)은 50대로 확인됐다.
A 씨는 “북한 정찰총국은 ‘암살·파괴 공작조’를 파견할 때 늘 두 가지 이상의 방안을 짜놓고 작전을 개시한다”면서 “독극물 공격을 위해 포섭한 현지 여성들이 작전에 실패했다면, 인근에서 배회하던 살인조 ‘극단 행동대’가 즉시 투입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일의 사태 속에서도 ‘김정남 살해’라는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기 위해 별도의 살인조가 대기 중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또 “이번 암살 사건은 해외주재 고정간첩이 아닌 별도로 파견된 4명의 ‘피스톤 암살조’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동남아 지역 고정간첩들은 이번 사건 준비 과정서 김정남의 거처와 행방을 수시로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실제 암살은 이번 작전만을 위해 투입된 살인 전문 전투조(암살조)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 분석했다.
실제 이번 암살 작전을 지휘한 것으로 추측되는 북한 국적 남성 용의자 4명은 사건 발생 약 1, 2주 전 개별적으로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뒤 사건 당일 즉시 출국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지에서 장기간 체류하던 고정간첩이 아닌, 오로지 김정남 암살 작전만을 위해 즉시 투입된 인물들임을 유추할 수 있다.
A 씨는 “정찰총국에는 해외파견 공작원들을 전문 양성하는 ‘35호실’과 ‘자료연구소’라 불리는 별도의 부서가 존재한다”면서 “이곳에선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 공작원들이 외국어와 각종 고난도 훈련,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항상 임무 대기 중에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특히 사건 직후 유일하게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다가 체포된 북한 국적 용의자 리정철이 ‘장비연구소’ 소속일 것이란 분석도 내놨다. A 씨는 “리정철은 기술연구 명목으로 동남아 지역을 돌면서 사제폭탄과 독극물 용품을 구입하고 이를 제조하는 ‘장비연구소’ 연구원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장비연구소’는 정찰총국 96소의 정식 명칭으로, 리정철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함께 해외에서 회사 사장이나 회사원, 연구원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알려진다. A 씨는 “일반 해외 파견 노동자들과 달리 이들은 가족이나 부부 단위로 파견돼 공작 활동을 하기도 한다”면서 “물론 실제 가족인지, 가족으로 위장한 공작단인지는 수사를 통해 알아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이어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이 모두 북한으로 돌아간 데 비해 리정철 가족만 현지에 남은 건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된 계획이었을 것”이라면서 “리정철은 북한 암살조 4명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여성 용의자들에게 독극물을 만들어준 장본인이지만, 사건 당시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꼬이게 하려 했던 것”이라고 관측했다.
현재 리정철은 현지 경찰 조사에서 자신은 김정남 암살에 참여하지 않았고, 사건 당시 쿠알라룸프르 공항에 있지 않았다면서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이와 함께 A 씨는 김정남에 독극물 공격을 한 베트남·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용의자들에 대해 “정찰총국은 ‘북한 소행’ 빌미를 줄이기 위해 현지인을 금품 또는 돈으로 매수하거나 포섭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현지인 여성 2명이 바로 그 희생양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테러) 대상에 대한 정탐과 파괴, 살인, 납치행위는 정찰총국의 근본사명이며 세계 각국 여러 지역에서 수십 년간 활용해 왔던 수법”이라면서 “북한 국적 용의자들의 신원이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번 사건은 북한 정찰총국의 소행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