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13일 담화를 통해 미북관계 정상화와 비핵화간 선후문제와 검증문제 등에 대한 입장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집권 후 대북정책 재검토에 들어갈 미국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선수(先手)를 날린 셈이다.
북한은 담화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실현보다 미북관계 정상화가 우선이며 관계정상화 이후 핵군축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해야 한다는 ‘先관계정상화 後비핵화’ 논리를 폈다.
미국의 대북 ‘핵위협’과 ‘적대시 정책’에 따라 핵을 개발했다는 논리를 재차 강조한 것이다. 북한은 제2차 북핵위기(2002년) 당시에도 같은 논리를 편바 있고, 부시 행정부의 ‘평화협정’ 체결 언급 당시에도 미북수교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더구나 새해 공동사설에서도 ‘조선반도 비핵화’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관계정상화)에서 ‘양자간 핵군축 협상’을 통해 북핵문제를 다루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결국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는 ‘핵보유국’으로서 오바마 정부를 상대하겠다는 일종의 ‘사전포석’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담화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의 근원적인 청산이 없이는 100년이 가도 우리가 핵무기를 먼저 내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핵문제를 풀려면 모든 핵보유국들이 모여 앉아 동시에 핵군축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이와 관련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2차 북핵위기 당시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따른 핵무기 개발→부시 행정부의 평화협정 추진 가능성에 언급 이후 핵실험→평화협정 문제가 아니라 미북 수교를 해야 ‘비핵화’ 가능하다는 논리가 진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대북전문가는 “‘조선반도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지대화’(nuclear freezone)를 형식 논리로 하여 ‘북미 핵군축 협상→북미 평화협정 및 주한미군 철수→북미 수교’의 코스를 밟겠다는 것”이고 “내용적으로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영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는 북한식 논리의 연장선상”이라며 “한반도 비핵화 주장을 통해 미국과 핵(核)을 포함한 군축협상을 벌이기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오바마 행정부에 우선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은 자신들의 핵무기 개발 논리를 미국의 핵위협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근본원인을 없애야 한다는 차원으로 북미관계 개선을 비핵화보다 먼저 내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안인 검증문제에 대해서도 담화는 ‘조선반도 비핵화’에 따른 남북한 동시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기존입장을 재확인했다.
담화는 검증을 비핵화의 최종단계에 해야 하며, 남북한 동시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남한에 대한 동시사찰의 범주를 ▲미국 핵무기의 남한 반입 및 배치, 철수 경위를 확인할 수 있는 ‘자유로운’ 현장 접근 ▲핵무기의 재반입 및 통과 여부를 정상적으로 사찰할 수 있는 검증절차의 마련이라고 명시, 구체화했다.
이는 북핵 ‘검증’ 협상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관련국들이 ‘시료채취’와 미신고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현장접근 등을 북한에 요구한 것에 대한 전형적인 북한식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른 반박 논리를 재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선(先)관계정상화-후(後)비핵화’ 논리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내정자도 13일 미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미북 관계정상화는)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제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며 “핵 확산 활동을 한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는 한, 관계 정상화는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정책 입안을 마무리한 후 직접대화와 6자회담 등을 통해 본격적인 북핵협상에 돌입하겠지만 북한이 ‘先관계정상화 後비핵화에 따른 군축협상’에 대한 입장을 고수하는 한 북핵문제 진전은 난망해 보인다.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의 입장이 변화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칙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박 연구위원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핵협상이 재개되더라도 해결점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해 ‘공세적 맞받아치기 전략’을 고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박 연구위원은 “오바마 진영은 ‘핵없는 세계’라는 기조에 따라 북한과 직접적 대화를 추진하더라도 국제사회의 일반적인 룰(rule) 안에서의 협상할 것”이라며 “북한이 잠정적으로 핵을 인정받으려는 전략을 취하면 원칙적 잣대를 들이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바마 진영이 협상 과정에서 인센티브 등을 포괄적으로 제안할 수는 있겠지만 ‘비핵화’라는 목표를 양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북한의 주장은 결국 미북수교가 이뤄지기 전에는 신뢰가 없기 때문에 핵포기는 없다는 논리”라면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수립과정까지 당분간 소강상태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이 기간 북한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조정하려고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미국이 대화를 하겠지만 북한이 핵을 가진 상태에서 수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