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외교관 출신 “김정일 아래 권력서열은 밤에 결정된다”

▲ 김정일이 최측근 인사들과 함께 김일성 시체에 참배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을 무기로 국제사회와 한판 도박을 벌이고 있는 김정일. 최대의 우방국인 중국을 등지면서까지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김정일의 행동은 주변국들에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북한내 군부 강경파의 주도라고 잘못 분석하고 있지만, 북한은 김정일 개인의 판단과 결정으로 굴러가는 일인 지배의 사회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주요 정책들을 어떻게 결정할까?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현성일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최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북한의 국가전략과 간부정책의 변화에 관한 연구>에서 김정일 체제유지의 주된 동력을 ‘측근정치’라고 꼽았다.

김정일은 자신에게 100% 충성을 다짐한 측근들을 중심으로 ‘밀실정치’를 펴면서 국내외 정책을 결정한다. 현 연구위원은 “국방위원회 중심의 변칙적인 정권구조가 수립된 것 자체가 김정일이 국가지도자로서 전면에 나서 정상적인 정치행태를 복귀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북한 권력체계의 특성을 분석했다.

현 연구위원은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영어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에서 8년간 교수로 일했으며 1989년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겨 잠비아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중 1996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 맨 윗줄 왼쪽부터 <김정일 후계자 내정 이전시기 측근들. 강관주, 오진우, 김국태, 김기남, 오극렬>, <김정일 후계자 내정 이후 시기 측근들. 장성택, 백남순, 전병호, 길재경, 김영춘>, <1990년대 이후 시기 김정일의 측근들. 박봉주, 조명록, 박재경, 김명국, 원응희>

1. 김정일의 측근, 그들은 누구인가?

김정일은 김일성 시기 권력 엘리트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드는 동시에 자신의 측근 인물들을 권력의 핵심에 기용하는 방법으로 후계구도 구축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김정일의 측근 인물들은 친분관계의 형성과 측근의 발탁, 권력 진입의 시기와 배경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 김정일이 후계자 결정 이전부터 친분관계를 가진 인물들.

먼저 김정일의 친인척들을 들 수 있다. 김정일은 일반적으로 김일성의 친인척들을 고위직에 등용은 하되 중앙당 조직지도부 등 권력의 핵심이나 측근으로는 발탁하지 않았다. 허담(김일성의 사촌매부)과 리용무(외사촌 매부), 강관주(외사촌의 아들), 동생인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장성택의 형 장성우 등은 후계체제 확립 이후에 권력의 핵심에 기용됐다.

김정일이 대학졸업 후 1964년부터 중앙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에서 근무하면서도 함께 일했거나 이 시기 당ㆍ군ㆍ정 등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 김정일과 친분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도 주요 측근들로 부상했다.

김정일은 또한 후계자 승계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빨치산 출신들 중 영향력이 강하면서도 생모 김정숙과 친분이 있던 김일, 최현, 오진우 등 인물들의 환심을 얻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오진우는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3인자의 지위에 오를 정도로 최대의 신임을 얻어 원로들 중 유일하게 김정일의 측근이 됐다.

◇ 김정일의 후계자 결정 이후 친분형성과 함께 곧바로 권력에 진입한 인물들.

후계자로 결정됨으로써 권력 2인자로 부상한 김정일의 주변에는 수많은 ‘선견지명 있는’ 권력 엘리트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후계자 내정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이후부터는 측근 발탁에서 공식적인 인사제도를 통한 엄격한 파악과 검증절차가 적용됐다.

이들은 김정일의 당권 장악과 유일지도체제의 확립 과정에 당ㆍ정ㆍ군ㆍ외교ㆍ대남 등 각 분야에서 충성심과 업무능력, 자질 등이 검증되어 측근으로 발탁되거나 김정일의 사생활 보장과 비자금 조성에 기여한 인물들이다.

2. ‘측근파티’를 통해 결정되는 북한의 국가 정책

김일성 시대에는 대부분의 국가정책이 당 정치국과 협의회 등 공식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이뤄졌으며 이러한 자리에는 반드시 관련부문 수장들을 참석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현지지도나 외국방문 시에도 관련부분 간부들을 대동함으로써, 언론을 통해 공개되는 동석 혹은 동행 간부를 통해 북한이 추구하는 전략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 후계체제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공식적 정책결정방식은 유명무실화 된 반면에 ‘제의서(보고서) 정치’와 ‘측근정치’가 중요한 정책결정방식으로 부상했다. 외교 부분의 경우에도 김정일이 측근파티에서 혹은 전화로 강석주 1부상에게 하달한 지시를 상관인 외무상이 뒤늦게 전달받는 현상이 후계체제 기간 지속됐다.

보통 술과 여흥, 공연 등이 수반되는 파티에서는 전반적인 대내외 정세와 동향으로부터 국가정책과 인사문제에 이르기까지 각종 현안이 주제로 제기되었으며, 공식 석상에서 힘든 솔직하고 진실이 반영된 견해들이 개별 독대나 의견교환 형식으로 제기되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밀실정치를 통해 측근들은 주요 정책으로부터 인사문제에 이르기까지 김정일에게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이 부여됨으로써 과거 당 정치국 위원이나 후보위원들이 수행하던 국가전략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3. 김정일과의 ‘운명공동체’ – 측근들에 대한 초호화 ‘선심정치’

김정일은 측근의 발탁과 함께 일단 발탁된 측근들이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충성하도록 간부들 사이에서 충성경쟁과 상호견제를 유발시켰다.

충성경쟁을 목적한 김정일의 측근정치에서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은 이른바 ‘선심정치’로 대표적 사례가 바로 비공식 연회다. 측근연회는 원래 김정일이 후계자 내정을 전후하여 간부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으나, 후계자 내정 이후부터는 주로 측근들을 관리하고 밀실정치를 실현하는데 이용됐다.

측근들에 대한 ‘선심정치’는 각종 선물의 제공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서기실이나 김정일 비자금 담당 39호실, 대남 공작부서들과 해외 공관들을 통해 일본과 유럽, 동남아 등지에서 구입해오는 각종 제품들이 연회참석이나 김정일 생일 등을 계기로 측근들에게 선물로 제공됐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측근들은 분야별로 배정된 아파트들에서 비측근 간부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이 과정에서 측근들의 연회 참석과 선물제공 등의 실상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비측근 간부들에게 알려짐으로써 위화감을 조성하자 1994년 경 측근 간부들만을 위한 최고급 주택 단지를 따로 건설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태의 선심정치는 측근들은 물론 가족과 후대에까지 충성심이 대물림되도록 하는 것 외에도 많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측근들의 부유한 생활 실상이 일반에 알려짐으로써 초래되는 주민들의 불만과 증오심은 역으로 측근들로 하여금 체제붕괴는 곧 자신들의 파멸이라는 피해의식과 김정일과의 ‘운명공동체’ 의식을 유발함으로써 체제옹위에 사활적인 입장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4. ‘영원한 측근도, 영원한 비측근도 없다’ – ‘충성심’ 극대화 전략

▲ 김정일이 측근을 모아 연회를 벌였던 창성 초대소 <사진=김정일의 요리사>

간부들 속에서 ‘영원한 측근도, 영원한 비측근도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지속적인 충성경쟁과 상호견제를 유지하는 것은 김정일의 측근정치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관리 수법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원한 측근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들은 김정일의 대학동창이며 입당 보증인인 리동호가 한마디 말 실수로 처형된 사례와 ‘최장수 측근’으로 알려진 김시학이 조직지도부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하고 측근에서 밀려난 사례, 김정일의 신임을 얻어 국제비서가 된 김용순이 ‘우쭐거리다가’ 탄광노동자로 좌천된 사례 등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신임을 빙자하여 세도를 부리거나 교만하거나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설사 측근이라 해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본보기 차원에서 일벌백계 (一罰百戒)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채찍을 맞은’ 간부들 중에서 충분히 반성했다고 판단되거나 사상적으로나 실력으로 보아 다시 쓸 수 있다고 평가되는 인물은 ‘재생’의 기회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당근’이 차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처벌을 받은 간부들은 자신을 언제 다시 불러줄지 혹은 영원히 버림받는 것은 아닌지 항상 고심하면서 자신의 충성심과 ‘진가’를 보여주기 위해 최대한의 희생성과 헌신성을 발휘하게 된다.

5. 측근들의 활동을 보면 ‘김정일의 정책’이 보인다

측근정치는 김정일 후계체제 시기의 권력의 2원화 구조를 반영하여 나온 특이한 통치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통치방식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자연스럽게 유일적 권력구조가 이루어진 조건에서 당연히 사라져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 정권 출범 이후에도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정상적인 정치형태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김정일 정권 출범 이후 당대회나 전원회의는 물론 국방위원회 회의조차 소집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결국 후계체제 시기에 나타난 김정일의 ‘제의서 정치’와 ‘측근정치’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김정일 시대의 확고한 정치행태로 자리 잡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국방위원회 중심의 변칙적인 정권구조가 수립된 것 자체가 김정일이 국가지도자로서 전면에 나서 정상적인 정치행태를 복귀하려는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이와같은 측근정치는 권력의 속성과 권력이 지향하는 정책방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김정일 후계체제 시기 중점과제였던 수령절대주의 체제와 유일지도체제의 확립은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핵심측근집단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의 군권장악과 군부통치, 국방위원회 중심의 국가기구 개편과 선군정치는 자연히 군부를 새로운 핵심 측근집단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부터 전병호, 박송봉, 주규창 등 군수분야 핵심들이 측근으로 기용된 사실은 이 시기부터 김정일이 핵개발 분야를 중시해 왔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강관주(대외연락부장), 오극렬(작전부장), 림동옥(통일전선부장), 허명욱(35호실 부부장) 등 4대 대남 부서장들이 여전히 핵심측근의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것은 대남전략이 북한의 국가전략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김용순 사후 측근인 림동옥을 통전부장에 기용한 것은 김정일의 대남전략에서 민족공조가 앞으로도 핵심요소로 될 것임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오랜 측근인 림상종이 대남 경협사업을 총괄하는 38호실 실장에 등용된 것도 남북경협을 체제유지비용의 주요 창구로 보고 있는 김정일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조직지도부 부부장과 서기실 부부장을 겸임하고 있는 리수영(가명 리철)이 20여년째 스위스 주재 대사직을 내놓지 않고 있는 현상과 2005년 미국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제재를 계기로 강상춘 서기실 부부장이 현지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 등은 체제유지 비용에 대한 김정일의 지속적인 관심과 우려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측근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대미 핵 외교가 북한의 대외전략에서 핵심임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