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여성 굶어죽는데 성매매 안된다?”

▲ 함흥 출신 아주머니와 딸이 산속에서 생활하는 모습 <출처:좋은벗들>

“북한 여성들이 먹고 입고 살만한 조건이 되고 마음씨 착한 남자를 만날 운만 있다면 두세번 성매매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을 뛰쳐나오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내가 여성학을 공부하는 한국친구에게 한 말이다.

“뭐? 성매매 당하는 것이 굶어죽는 것보다 낫다고? 그건 말도 안돼!”

그녀는 나의 말을 즉석에서 맞받아 외쳤다. 전혀 예측을 못했던 반론이라 이를 재확인하고 싶었다. 하여 다음날 어느 과목 수강시간에 기회를 보아 이 주제를 다시 꺼냈다. 그 반응은 전날의 것과 같았다.

“우우, 말도 안 돼!”
“와아. 그건 어림도 없어!”

물론 기아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의 눈물어린 성토가 뒤를 이었고 함께 강의 받고 있던 수강생들 모두가 나의 열변에 끝내는 공감을 했지만, 정작 나는 그 이후로 기아와 성매매에 대한 문제에 생각이 온통 빠져버렸다.

성매매란 무엇인가? 뼈를 말리는 굶주림에 죽도록 시달리다가 숨통이 끊어지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배척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전에도 그렇거니와 지금도 주위 한국분들로부터 ‘북한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데 그게 사실 이예요?’라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그때마다 가슴이 막혀 대답이 안 나왔다. 나는 1959년, 이른바 ‘베이비 붐’시대 말기에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서 태어나 탈북하기 직전까지 북한에서 기아(飢餓)시대를 두 번 정도 겪게 되었다.

굶주림은 非인간화의 시작

처음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어머니는 몸을 간신히 움직이는 중환자였고 아버지도 한 달에 보름은 진단서로 때우는 경환자였다. 즉 양부모님이 모두 환자인 셈이었다. 아버지 노임은 늘 미불이었다. 그런 판에 양부모 잃은 사촌형제 셋(2살, 5살, 8살)까지 맡아 키우느라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어려웠다.

상순(1일~15일) 보름분 배급을 타오면 첫날 한끼만 밥해먹고 하순분(15일~월말) 배급을 탈 때까지 마흔네번의 끼니는 노상 죽이었다. 그때 안 먹어본 풀이 없었다. 아카시아 꽃, 진달래 꽃, 냉이, 산나물. 심지어 돼지먹이풀인 비듬 풀, 능쟁이까지……. 그 쓰디쓴 풀을 캐다가 삶아 며칠을 물에 우려낸 후, 그 속에 강냉이 가루 한줌씩 넣어 끓여 먹었다.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세대주라고 매끼 쌀밥을 따로 올리곤 하였다.

내 인생의 전부를 차지하는 듯싶던 그 길고 잔혹한 굶주림의 시간들은 사촌형제 셋이 혁명학원에 가고 다음해에 어머니의 자살로서 종결지어졌다. 그때 배고팠던 기간이 장장 6여 년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굶주림이 아무리 길고 지겨웠을 지라도 적어도 혼란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죽을 끓일 정도로나마 정상적으로 배급이 있었고, 뜯어올 풀이 있었고, 간장 된장 공급체계가 살아있었다. 비누도 절대수요량에 못 미치긴 하나 매달 꼬박꼬박 팔아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처럼 절망적인 고통에 몰리는 집은 100호가 넘는 동네에서도 한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두 번째 기아 경험은 1995년 여름, 김일성 사망 다음해인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평양시에서 석달동안 식량배급을 못주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함경도 쪽에서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굶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국가배급에만 의존해왔던 다수의 평양시민들은 극도로 초조해졌다. 문학작가들은 서가의 책을 마대에 넣어 지고 시장에 나가 앉았다. 어떤 여성시인은 골목시장에서 저녁마다 국수장사를 했다. 밥을 굶고 대학에 출근한 교수들은 기운이 없어 의자에 앉아 강의를 했다.

식량부족은 생활필수품 부족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비누가 부족했다. 소금이 시시각각으로 떨어졌다. 소금이 금방 떨어지곤 하여 나도 빈 식기 들고 얼굴을 아는 아파트 집집을 오르내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간장 된장은 먹어본 지 오래됐다. 수돗물도 안 나왔다. 난방이 안 되서 아이들은 방안에서 동상에 걸렸다. 쌀을 익혀먹을 석유조차 공급 안됐다.

사람들은 점점 초췌해져 갔다. 칫솔질은 아침에 일어나 소금으로 한번 하고 양말은 한번 빨면 일주일 넘도록 신었다. 사람들이 발 벗고 들어와 앉는 공공장소는 어디를 막론하고 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말쑥하던 작가동맹 시인들이 한해겨울 내내 빨지 못해 앞섶에 기름때가 반질반질하게 앉은 동복을 부끄럼 모르고 입고 다녔다. 시내중심 탁아소 유치원 어린이들(부유한 집 자녀들이 대부분임)의 머리에서 이와 서케가 발견되었다. 직장에서는 도시락 싸들고 출근한 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무실이건 살림집이건 가리지 않고 문을 두드리며 음식물 구걸하는 거지들의 성화는 사람들을 곱으로 지치게 했다.

식량이 딱 떨어진 우리 집에서도 누군가 져다준 준 두부찌꺼기로 사흘을 꼬박 견딘 적이 있었다. 나중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와 젖먹이 아기를 들춰 업고 진땀 흘리며 친구의 집에 밥 한끼 얻어먹으려 찾아간 적이 다 있었다. 길을 걷다가 엉덩이 관절이 죽을 듯이 저려오는데 도저히 걸음을 옮길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은 채 그 자리에 한참씩 서 있어야 했다. 다행히 주머니에 1~2원이라도 들어있는 날엔 가까운 음식 매점에 가서 사탕 몇 알만 사먹어도 당장 아픔이 덜했다. 주머니에 단돈 50전도 없는 날엔 그마저 불가능했다.

60세대가 모여 살던 원자력공업총국 직원아파트에서 우리처럼 극도의 식량위기에 몰리던 가구가 다섯쯤은 되었다. 원자력아파트면 평양시에서도 부유한 아파트에 속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였으니 평양시로는 주민의 40%이상이 우리 집 정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였다. 탄광, 광산, 군수기업체들이 모여 있는 지역은 그렇게 굶는 수가 90%에 달했다.

굶주림은 이성, 양심, 정조를 모두 파괴

내가 추방되어 북쪽 지방에 와보니 한마디로 사람들 전체가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사고는 온통 먹는 데로 집중되어 있었다. 일종의 환각상태였다. 아이, 어른, 임신부, 젊은이 가릴 것 없었다. 먹을 것을 위해서라면 그가 누구든 어느 때든지 거짓말 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기운 있는 젊은이들은 도시락 한 개를 위해 목숨 건 강탈을 일삼았다. 아이들은 음식물 환영만 얼른거려도 구토물이든 썩은 것이든 상관 않고 달려들어 개처럼 핥아댔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정조관념을 최고로 알았다. 외화상점이 생기면서 성매매하는 여자들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지식인들은 ‘나라가 망하려면 여자들부터 버려진다’며 시대를 개탄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여자가 성매매에 나서는 것을 있을 법한 일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10년 후, 그들의 사고는 180도로 바뀌어 졌다. 전 국가적인 기아 앞에 그 도도하던 청교도식 정신이 겸허해졌다. 여자들이 한끼 밥을 위해 몸을 내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 것이었다.

인간을 동물화 시키는 절대기아! 그 앞에서 이념이나 정견, 정조와 사상들은 설자리가 없다. 바로 이 하나의 이유 때문에 기아의 땅을 탈출한 탈북여성들이 겪은 행위가 어떤 비인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그들의 탈북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진이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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