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두고온 6남매 그리는 `望百의 父情’

“미안한 마음 뿐이지. 혼자 (남으로) 내려와 사는 것이.. 생사 확인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올해 한국나이로 98세인 재미교포 리근 씨는 1일 뉴저지주 잉글우드의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북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1912년 김일성 주석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리 씨는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송산동 출신으로 일제 때 철도 공무원을 하다가 6.25 전쟁이 터질 때까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압강면점'(鴨江麵店)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냉면을 1천그릇씩 팔았다고 한다.

1950년 10월 그는 폭격을 피해 미군을 따라 혈혈단신 월남했다. 당시 34세이던 처 오금주 씨와 태현.영자.태영.태숙.태윤.태옥 등 3남3녀를 고향에 남겨 놓았다. 큰 아들은 13세로 중학교 1학년이었고 , 지금 살아있다면 환갑이 다 됐을 막내 태옥은 생후 1년도 채 안된 젖먹이었다.

한 달 쯤 있다가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떠나온 고향에는 이후 58년동안 갈수 없었다.

월남해서 경찰 전문학교를 단기 수료한 그는 전남 도경 수사과장, 전남지사 비서실장과 영산포 수리조합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고향 생각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는 1970년대초 퇴직후 경기도 파주로 옮겨가 실향민들과 민통선 내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1992년 아들(태헌) 내외가 정착해 있는 뉴저지로 옮겨왔다. 미국에 와서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 신문과 방송 뉴스를 보면서 북한 관련 소식을 메모해 왔다.

가족 상봉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2003년에는 재미 실향민 방북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가족들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당시 북쪽에서 “가족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와 다시 평양을 가려고 비행기표까지 끊어 놨지만, 출발 당일 “동명이인이었다”는 소식에 좌절한 적도 있었다.

태헌 씨는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본가 계급이었고, 월남까지 한 데다 남한에서 경찰공무원을 지내 북쪽 가족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 탈북자 중에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 싶어 연길 방송에 광고를 낸 적이 있는데, 신의주 출신의 한 탈북자로부터 큰 형은 사망했고 둘째 형은 함경도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안타까움을 털어 놓았다.

1년 전만 해도 잉글우드 자택 주변의 동네길 청소를 도맡아 했던 `망백의 노인’은 다리를 다친 이후 많이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몇 달 전 한국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여전히 건장하다.

다만 가는귀가 먹어 가족들과의 대화는 글로 적어 물어보면 노인이 읽은 뒤 대답하는 식이다.

리 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목적은 고향에 가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걸어서라도 갈 수 있으면 가고 싶고, 통일이 돼 그 다음날 고향 선산에 묻히면 그만”이라며 “먹고 살기도 어렵다는데 얼마나 고생들 하는지,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배불리 먹이고 싶은 생각 뿐”이라고 말했다.

리 씨의 절박한 소식은 유진벨 재단이 운영하는 재미 교포 이산가족 돕기 프로그램인 `샘소리’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마크 최(뉴저지 호레이스맨 고교 11학년) 군이 알게됐고, 최 군의 아버지 최윤석씨를 통해 교포사회에 알려졌다.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의 주역인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을 위한 뉴욕.뉴저지 한인 후원 모임을 오는 2일 자신의 맨해튼 식당에서 열 예정인 최 씨는 “혼다 의원에게 리 씨의 사연을 얘기하고 도움을 요청해 놨다”면서 “미 의회 차원에서 움직인다면 리 씨 생전에 상봉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