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시장 장악 화교들…김정일에게 약이냐, 독이냐?

▲평양제1백화점, 사진-북한화보 조선

북한이 중국의 ‘동북 제4성’ 변방시장이 되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있는 가운데, 북한시장의 주도권을 잡은 화교들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최근 북한 주민들은 화교들이 없으면 시장이 마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화교들은 북한에서 신흥부자로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주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신의주 주민 김창열(가명)씨는 최근 데일리NK와의 전화통화에서 “신의주에서 대문에 커다란 ‘복'(福))자를 붙인 기와집은 죄다 화교들 집”이라며 “화교들이 신의주의 일등 부자”라고 말했다. 신의주는 평양과 달리 아파트보다 기와집을 더 쳐준다. 특히 화교들이 사는 기와집은 화려하게 꾸며놓았다.

김씨는 “지금 신의주 시장에 거래되는 생필품의 90% 정도가 중국산”이라고 말한다. 90%라면 약초와 일부 농토산물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다. 90% 중에서도 절반 이상이 화교들이 푸는(유통하는) 것이라고 한다.

김씨는 만약 화교들이 중국에서 생필품을 들여오지 않으면 시장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만큼 북한의 종합시장(장마당)에서 화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아울러 화교들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외부 정보를 북한 내부에 전달하는 중개자 역할도 하고 있다. 2004년 용천 폭발사고도 맨처음 화교들이 핸드폰으로 중국에 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문에 화교들의 ‘활약’이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북한정권에게 약(藥)이 될 수도 있고, 또 외부정보 유입이라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북한내 화교 얼마나 되나?

2001년 중국 ‘요녕조선문보’가 북한측 자료를 참고한 통계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직후 한반도에 남은 전체 화교 수는 8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중 6만 명이 북한에 살다가 중국의 정권수립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대부분 귀국했다. 1958년 경 북한의 화교는 3,778 세대, 1만4351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남새(채소)재배, 개인 수공업, 요식업에 종사하다 50년대 후반 북한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실시로 독립적인 경제권을 상실했다. 그후 이들도 80년대 초까지 대부분 중국으로 돌아갔다.

‘요녕조선문보’는 2001년 북한내 화교 수를 대략 6천 명으로 확인했다. 이중 절반 이상이 평양에 거주하고 있으며, 평안북도에 3백 세대, 자강도와 함경남북도에 약 3백 세대 정도가 살고 있다.

현재 북한에는 평양, 청진, 신의주, 강계에 4개의 화교 고등중학교(11~17세, 6년제)가 있다. 그외 함흥을 비롯하여 각 도 소재지에 화교 소학교(7~11세, 4년제)가 있다.

1981년~86년 청진 화교중학교를 다닌 왕옥경씨(신의주 거주, 가명)는 “당시 한 학년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5~6명밖에 없다”고 말한다. 요즘은 소학교 과정만 북한에서 마치고 중학교 과정은 대부분 중국에 보내 공부시키는 추세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대학에 입학하려면 중국에서 중학교를 마쳐야 중국말도 잘 할 수 있고 과외도 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식량난 시기 북-중 무역으로 떼돈

북한 화교들은 80년대 초까지 부자가 없었다. 북한 주민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80년대부터 양말, 머릿수건, 손거울, 카드(주패) 등을 중국에서 들여와 파는, 그야말로 보따리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북한 화교들이 갑자기 큰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 북-중 무역을 본격적으로 벌일 때부터였다.

현재 중국 단둥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산가인 손광미(가명, 52세)씨는 가난한 화교에서 일약 부자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다. 청진에서 살던 손씨는 80년대 초 맨먼저 중국과의 장사에 나선 인물이다.

처음에 손씨는 결혼예물로 받은 시계를 팔아 장사 밑천으로 삼을 정도로 가난했다.

손씨가 떼돈을 번 것은 금 밀매였다. 북한은 금을 국가소유, 즉 김정일의 ‘개인재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개인들 사이의 금 거래를 엄격히 규제한다. 그러나 금광 노동자들 사이에 몰래 유출되는 금이 있고, 또 부정한 방법으로 금을 모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특히 8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서서히 몰락하면서 갖고 있던 금을 몰래 파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금 거래는 중국과 통하는 극소수 화교 위주로 은밀히 이루어졌다. 북한에서 금을 팔겠다는 사람은 많고 사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금을 중국에 밀매하면 큰 시세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손씨는 “북한에 있는 화교들 중 60%가 그때 금 밀매로 큰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는 화교들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대략 85~89년까지 금 밀매였고, 두 번째는 95~99년까지 북한의 대량아사 시기(식량난)였다.

손씨는 “대량아사 시기때는 조선(북한)에 모든 것이 부족하다 보니 생필품을 모두 화교들이 공급하게 됐다”며 “당시 식량, 천(옷감), 설탕 등을 중국에서 대규모로 가져와 팔면 한번에 1백만 위안(한화 1억3천만 원)을 남긴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손씨는 이 두 시기를 모두 놓치지 않고 돈을 벌어 현재 알려진 재산만도 5천만 위안(한화 60억 상당)에 달하는 거부가 됐다.

화교들은 중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또 유창한 중국 말과 중국내 인맥(친척 등)이 많아 장사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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