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서도 못한 1등해 기뻐…25년만에 자존감 찾아”

“(북한) 탁구 국가대표출신이었지만 남편과 아들이 눈앞에서 굶어 죽었어요. 통곡할 힘도 없이 방바닥에 쓰러져 죽기를 기다리던 날 저의 자존감도 죽어버렸죠… 오늘 한국에서 25년 만에 탁구로 자존감을 찾게 되어 너무 기뻐요.”


지난 2일 서울 양천구 신월문화체육센터에서 진행된 제3회 GPF 코리안드림배 ‘한반도 탁구 대축제’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당당히 우승한 북한 탁구 국가대표 출신 김향희(가명) 선수가 한 말이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그는 10세 때부터 함흥시 사포구역 체육지도위원회에서 탁구 선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14세에 평양시체육단에 들어가 국가대표로 선발됐으며, 북한의 탁구 영웅 리분희 선수와 함께 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출신 성분 때문에 국제대회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1960년대 북송된 재일교포, 아버지는 부모님이 중국으로 갔다. 그의 부모는 일본과 중국에서 친척들이 보내온 돈으로 그를 국가대표 선수로 키우는 데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부모의 출신 성분이 딸의 선수 생활에 걸림돌이 되자, 어머니는 화병을 앓다 세상을 떴다.


결국 그는 10여년의 선수 생활을 접고 고향에 내려왔지만,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데일리NK는 지난 3일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김향희 선수를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북에 남아 있는 가족 때문에 얼굴은 공개할 수 없다. 그는 비록 아마추어 대회이지만 우승해 북한에서 잃어버렸던 탁구 선수로서의 자존감을 25년 만에 다시 찾은 것 같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2일 서울 양천구 신월문화체육센터에서 진행된 ‘한반도 탁구 대축제’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설송아기자


-탁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탁구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어머니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셨다. 9살 때 어머니와 집에서 TV로 방영하는 탁구경기를 보면서 ‘나도 탁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머니는 함흥시 사포구역체육지도위원회 탁구 구락부에 넣어주셨다.
 
1960년대 첫 만경봉호를 타고 귀국한 어머니는 일본에 계시는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을 나에게 투자했다. 아침 7시부터 새벽2시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고,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뒤바라지 때문이었다.”


-리분희 선수와 같이 선수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리분희 선수도 나와 같은 함흥 출신이다. 소학교 시절부터 체육구락부 생활을 함께 했으며 평양에서 같이 생활했다. 1980년대 리분희 선수는 압록강체육단 선수로 여러 국제대회에 나갔지만, 나는 출신 성분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선수생활을 마치고 결혼생활은 어떠했나.
“남편은 병원의사였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고 했지만, 1993년부터 병원의사들 배급이 완전 끊겼다. 온 가족이 굶어죽을 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일본 친척들의 송금도 끊겼다.


다른 여성들은 장사를 했지만, 난 배운 게 탁구밖에 없어 장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94년도 시집 부모님들이 굶어 돌아가셨고 이듬해 남편이 죽었다. 이듬해 아버님마저 중국의 친척 도움 받으려고 탈북하셨다. 무엇이든 벌어보려고 장마당에 나갔지만 장사가 안 됐다. 


7살 아들이 며칠 째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1996년도 유행하던 장티브스 전염병에 걸렸다. 병원에 가야 약도 없고 내가 벌지도 못하니 아들에게 쌀죽 한 그릇 끓여주지 못하고 앉아서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그리웠다. 나도 일주일 굶고 기력이 없어 아들을 안고 정신을 잃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들은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통곡할 힘도 없었다. 차가운 방바닥에서 나도 죽기를 기다렸다. 한때는 국가대표 선수로 평양에서 활약하던 내가 자존심마저 죽어있는 초라한 모습에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다.”


-어떻게 탈북하게 되었나.
“남편도 잃고 자식까지 땅에 묻은 북한 땅에서 나는 숨도 쉬기 싫었다. 중국에 간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국경으로 발걸음을 옮겨 인신매매꾼을 만나 중국에 팔려갔다. 한족에게 팔려간 몸이라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5년을 지내던 중 아버님이 심양에 계신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정신없이 차를 타고 그동안 배운 중국말로 심양가는 길을 물어보며 나는 아버지를 7년 만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귀하게 자란 딸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면서 밤새 나를 잡고 눈물만 흘리셨다.”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석 달간 중풍 치료를 받던 아버지가 하루는 나에게 ‘중풍은 치료한다고 낫는 병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너는 한국에 가거라. 그래도 한민족이니까 중국보다는 나을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이 말을 남기고 내가 사온 약을 한 알도 입에 넣지 않고 돈을 쓰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돌아가셨다. 나는 또 한번 타양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버지를 중국 땅에 묻고 2010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한국에서 탁구대회에 참가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탁구하고는 너무도 아픈 운명이어서 생각하기도 싫었다. 우연한 기회에 ‘GPF글러벌피스재단’을 알게 되었다. 재단은 통일에 대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새터민들의 자존심감 문제가 중요함을 깨닫게 되면서 이들의 자존감을 탁구대회로 이뤄지고 주고자 했다. 자존감이라는 말이 나에게 와닿았다. 그래서 남한에서 진행하는 탁구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1등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남북 선수들과 참가자들이 열심히 응원해주셔서 북한에서도 하지 못한 1등을 했다. 25년 만에 잃어버렸던 자존감을 찾아 새로운 삶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1등 상장과 상금을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다. 남한 선수들과 탁구 시합을 하면서 소리지르고 웃어보니 느낀 게 있다. 냉전중이던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처럼 남북도 탁구로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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