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귀국사업은 사상 최대 유괴사건”

“조총련의 귀국사업은 의도적으로 교포들에게 접근해 벌인 유괴나 다름없다”

1963년 북한으로 이주했다가 37년만에 탈북,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 교포 2세 고정미씨(47세)가 조총련의 귀국사업과 북한의 실상을 폭로해 일본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6월 조총련을 상대로 1천100만엔(한화 1억 4백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청구하고 나선 것.

이번 소송은 2001년 한국 거주 재일 교포 2세 김행일씨가 도쿄(東京)지법에 손해배상 청구를 한 후 두 번째며, 일본 내 재일 교포로서는 최초다.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 교포 및 가족 9만 3천여 명은 부푼 꿈을 안고 북한행 귀국선에 올랐다. 당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은 일본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재일 교포들에게 ‘북한을 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며 소위 ‘지상 낙원론’을 선전했다. 하지만 북한으로 건너갔다 탈북한 귀국자들을 통해 이것이 모두 ‘거짓 선전’으로 밝혀졌다.

현재까지 탈북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귀국자는 170여명. 이들은 조총련의 선전을 믿고 북한으로 이주했으나 심한 차별과 감시를 받는 등 북한 체제의 모순을 느껴 목숨을 걸고 탈북한 사람들이다.

귀국 이후 이들은 북한의 실체를 알면서도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 했다. 수십 년 동안 북한에 거주하면서 북한 당국이 귀국자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 교포 사회에서 조총련의 영향력이 잔재하고 있기 때문에 조총련의 ‘귀국사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고 씨는 “조총련의 거짓 선전으로 인해 수만 명의 교포들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빼앗겼으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며 “지금도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을 교포들을 생각하면 조총련은 결코 용서될 수 없다”고 말했다.

고 씨는 “북에 있는 친족들이 걱정이 되긴 하지만 누군가가 얼굴을 내놓고 북한의 실상과 북한의 사주를 받고 귀국사업을 벌인 조총련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면서 “앞으로 우리 후대에는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송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현재 공판을 진행중인 고 씨를 만나 소송을 낸 배경과 인생의 우여곡절을 들어봤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얼굴을 공개하고 조총련을 상대로 고소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고민이 많았다. 후대들에게는 더 이상 이런 비참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결심했다. 물론 북한에 형제와 친척도 남아 있다. 친척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정면으로 얼굴도 내놓고 북한의 실상과 조총련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을 봐서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에는 북한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우리(귀국자)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 북한의 실체와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인데 우리는 앞장서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서게 됐다.

이런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데 나 하나의 희생으로 된다면 한(恨)이 없다. 엄마의 결심을 응원해주는 자식들이 고맙다”

-일본에서 조총련의 영향력이 많이 감소되고 있지만 여전히 교포사회에서는 조총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에서 살면서 조총련을 고소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결심일 텐데?

“만약 조총련을 비롯한 조총련 지지자들이 나를 비판한다고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은 이미 각오하고 있다. 조총련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 전에 기자회견을 했다. 북한에서의 차별과 멸시, 보위부에서 받은 고문으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것을 고발하는 자료를 지난 4월에 조총련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총련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조총련은 지금도 북한정권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총련의 귀국사업은 북한 정권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에서 실시됐다. 조총련이 교포들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법이라는 공신력 있는 제도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

물론 재일교포들 중에는 조총련을 아직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도 점점 변하고 있으며, 내가 조총련에 고소한 것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은 이기게 돼있다.”

“법을 통해 조총련 귀국사업의 실체를 밝히고 싶어”

-이번 재판을 통해 알리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재판에서 승소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손해 배상금에도 관심 없다. 재일교포들이 조총련에 속아 북한에서 어떠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수십 년간 살고 있는지 알리고 싶을 뿐이다. 귀국사업은 크나큰 범죄이자 유괴사건이다.

조총련은 유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세기가 지난 현재,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재판’이라고 생각한다. 법에 의한 재판을 통해 북한과 조총련이 벌인 유괴사건의 본질이 밝혀져야 한다.

북한으로 이주한 9만3천여 명의 동포들은 조총련의 거짓 선전 때문에 행복하게 살 권리와 인권을 빼앗긴 것이다. 지금도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을 우리 동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어떻게 북한으로 가게 됐나?

“1963년 3살 때 가족들과 함께 제 111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 함경남도 청진시에 도착했다. 이후 북한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조총련의 간부의 말에 속아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구나’라는 말씀을 눈물을 흘리시면서 자주 하셨다.

1962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나를 비롯해 언니, 남동생 등 세 명의 자녀를 부양하는데 어머니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 당시에 일본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사회적 차별이 있어서 생활이 쉽지 않았다. 그때 조총련 간부는 우리 가정의 이런 사정을 알고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어머니에게 ‘혼자 몸으로 어린 세 자식을 어떻게 키우냐. 북한에 가면 무상 치료,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 ‘북한에 가면 하고 싶은 것 다할 수 있으며,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당시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가는 것을 결정하신 것이다.”

-결국 조총련에 속아 귀국하게 된 것인가?

“당시 귀국 사업이 시작된 지 3년이 넘도록 일본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귀국자들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셨고, 조총련 간부의 말을 믿게 됐다. 북한에 도착한 후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며, 눈물을 자주 흘리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자식들을 위해 귀국했지만 결국 북한의 거짓선전에 속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조총련 간부는 의도적으로 어머니에게 접근해 공작을 했다. 사람들의 곤란한 환경을 역이용하는 아주 나쁜 사람들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리를 악용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北에 가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조총련 간부 말에 속아 북한행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북한에서 귀국자들의 삶은 차별 그 자체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든 차별을 받아야 했다. 물론 북한에서 잘 살기 위해 남들 보다 노력을 많이 했다. 북한에서 귀국자들을 ‘째포’라고 불렸다. ‘째포’가 잘 살려면 일반 주민보도 수십 수백배 노력해야 한다. 당시 나는 차별 받는 현실에 가슴이 아팠지만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았다. 본토 사람들(일반 주민)이 한 번 노력할 때 나는 천 번 이상 노력하자라는 각오로 생활했다.

1976년 신의주 제1사범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평안북도 체육단에서 강사로 일했다. 1980년에는 의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자녀도 낳아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탈북을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 북한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았나?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다니면서 동료 학생에게 ‘째포’라는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 인민학교 다닐 때는 북한 옷보다 좋은 옷을 입고 다녔는데 다른 학생들이 옷을 벗기고 찢는 등 나를 괴롭혔다. 당시 열 살이었는데 대낮에 벌거벗은 채로 공동변소에 숨어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간 적도 있다.

북한 사회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것은 고등중학교 때다. 김일성, 김정일이 참석하는 ‘1호 행사’에 동원되는 여자학교에 다녔다. 간부급 자식들이 입학하는 이 고등학교에 나를 포함해 두 명의 ‘째포’가 있었다. 원래 가기로 되어 있는 학교가 없어지게 되면서 우연히 이 학교에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심한 차별에 직면했다. 그래도 참았다. 참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을 받는 속에서도 남들보다 잘 살겠다는 일념으로 37년 동안 북한에서 살았다.”

-탈북하게 된 계기는?

“탈북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 서럽고 억울했지만 탈북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북한에서 체제를 부정하는 탈북은 사실상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결국 귀국자라는 신분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고 추방을 당하게 되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1996년, 아는 귀국자 남성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대학 강사에서 해임되고 추방명령을 받게 됐다. 30년 가까이 차별을 받아도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는데 귀국자를 도와줬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억울한 심정에 당과 법 기관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당 간부들은 조기 추방을 결정했다. 나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라도 탈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귀국자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추방당해 탈북 결심”

-탈북과정은 어땠나?

“그 후 2000년, 2003년에 두 번 탈북했다. 2000년 12월에 처음으로 탈북했다. 1년 반 동안 준비를 해 압록강을 넘었다. 중국 선양까지 가서 중국 공민증을 얻기 위해 갖고 있는 돈을 모두 지불했지만 사기를 당했다. 하지만 한국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돈도 모으고 아이들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백 명의 탈북자들이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옌타이(煙臺) 사건’이 발생해 대대적인 탈북자 체포 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수했다.

2003년 1월 23일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후 신의주 보위부에 넘겨져 1개월 동안 독방에 갇혔 있었다. 간수들은 기절할 때까지 나를 때렸다. 그 때의 고문 휴유증으로 지금도 조금만 긴장하면 온몸이 쑤시고 가슴이 떨린다. 2003년 4월경 고문과 영양실조로 산송장 상태가 되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후 몸이 회복되자 일시적으로 석방됐다. 아들도 2002년도 베이징에서 송환돼 수감돼 있었다.

석방된 후 수감되어 있는 아들과 재회했다. 아들은 40kg도 채 안 나갈 정도로 말라 있었고, 부축이 없으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 아들과 함께 평안북도 시골지역에 추방당했다. 추방된 이후 북한에서 한시도 살수 없다는 생각했다. 2003년 12월 다시 국경을 넘었고 2년 정도 중국에 머물다 2005년 일본에 입국했다.”

-일본에 귀국한 후 생활은 어떠한가?

“일본의 환경은 한국과 다르고, 북한보다 더더욱 다르다. 처음에는 사회 환경이 달라 주눅이 들었다. 참 힘들었다. 먹고 사는 문제 보다는 언어적 문제로 많이 힘들었다. 딸은 ‘히라가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회’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 또한 일본 정부에서는 장애자에 준하는 생활보호 대상이 되어 생활비 지원을 해주고 있다. ‘지키는 회’ 대표님과 회원들은 사비를 털어서 집을 구해주고, 생활 용품을 비롯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셨다. 또한 일본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을 소개시켜줘 일주일에 3번씩 공부를 하고 있다.

이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다. 이제는 일본어실력도 늘어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행복감을 느낄 때마다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북한 주민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다. 이번 소송이 그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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