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개성 낙타교, 對거란 강경입장 깃든 유적”

“’낙타교’ 유적에는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 ’낙타교 사건’이 깃들어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6일 북한이 지난해 발굴조사를 벌인 개성시의 고려시대 ’낙타교’ 유적과 관련, 본래 이름이 ’만부교’였던 이 다리의 이름이 낙타교로 바뀐 사연을 소개했다.

조선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때인 942년 10월 거란이 사신과 낙타 50필을 조선에 보내왔으나 고려 왕은 “일찌기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친선관계를 맺을 나라가 못된다”며 거란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을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 매어두고 굶겨 죽였다는 것.

신문은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려사의 내용을 열거하면서 만부교를 이로 하여 낙타교로 고쳐부르게 됐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중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그에 앞서 고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자 사신과 낙타를 보냈지만, 고려 태조는 만부교 사건을 통해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태조는 이후에도 후손들에게 남긴 ’훈요십조’에서 거란을 ’금수의 나라’라고 지목하면서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하는 등 적대적 태도를 유지했다.

낙타교는 개성시의 관훈동과 보선동을 경계지으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오천이라는 큰 개울에 놓였던 다리다.

지금은 이곳에 1971년 설치한 ’통일다리’와 1935년에 놓은 콘크리트 다리가 있으며, 두 다리 사이에 있는 낙타교 유적은 “본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잔해의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고 조선신보는 소개했다.

이 유적을 발굴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리창진(42) 실장은 “거란과의 관계에서 고려의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 낙타교 사건이 깃들어 있는 유적”이라며 “구조 형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보다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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