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 2단계 ‘연내완료’보다 ‘CVID 원칙’ 중요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모든 핵프로그램 신고’ 완료 시점이 12월 31일로 맞춰져 있는 가운데, 내달 1일부터 불능화 작업이 개시되고 북한 핵프로그램 신고도 2주 내에 시작될 것으로 보여 ‘비핵화 2단계 로드맵’이 탄력을 받고 있다.

지난 11~18일 북한을 방문했던 미국 핵 전문가팀은 영변 5MW원자로, 재처리 시설,핵연료봉 제조공장 등 3개 핵시설에 대한 연내 불능화를 위해 11개~12개 항에 대한 구체적 불능화 조치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6자회담 참가국들은 이번 전문가팀의 합의 결과를 토대로 세부 내용을 조율중이며, 조만간 6자회담 수석대표 차원에서 불능화 방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또한 당초 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불능화 방법에 대해서도 공개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불능화 방안의 주요 내용은 5MW 원자로의 경우 냉각탑의 내화벽돌이나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제어봉을 움직이는 ‘제어봉 구동장치’나 냉각펌프 등의 핵심 부품을 제거하는 방안을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재처리시설은 연료봉을 옮기는 크레인 또는 연료봉 절단장치, 방사능 물질을 처리하는데 사용하는 밀폐투명용기인 글로브박스, 핵연료봉제조공장은 우라늄과 화학물질을 섞는 반응로 등을 제거하는 방법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방안은 ‘연내 불능화’라는 시한을 맞추기 위해 제염 작업 등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핵심 부품만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핵시설에서 제거된 부품의 경우 북한 내에서 보관하되 국제원자력기구(IAEA)나 6자회담 참가국들의 감시를 받는 ‘특별관리’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는 25일(현지시각) 미 하원 아시아태평양.지구환경 소위와 테러.비확산.통상 소위가 공동 주최한 6자회담 청문회에서 향후 2주 내에 북한의 핵프로그램 전면 신고가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힐 차관보는 “북한은 오는 12월31일까지 모든 핵프로그램의 완전한 리스트를 우리에게 제공해야 한다”며 “우리는 향후 2주 내에 북한이 그들의 리스트를 우리와 공유하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해 ‘연내 신고 완료’를 강조했다.

그는 북한이 최초 신고한 리스트들이 “우리가 보길 원하는 정확한 리스트가 아닐 수 있다”고 말해 북한의 신고 개시 시점을 ‘2주 내’로 못 박은 이유를 설명했다. 적어도 2주 내에 신고절차를 시작해 연말까지 미국이 동의할 수 있는 리스트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이 얼마나 충실하게 핵프로그램을 신고하고, 이를 검증하느냐가 북한이 전략적으로 핵포기 결정을 내렸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첫 관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그러나 미국 스스로도 북한이 최초 신고할 리스트가 정확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

힐 차관보는 “북한이 핵시설과 핵물질, 핵프로그램을 빠짐없이 신고해야 하며, 그에 대한 검증도 이뤄질 것”이라며 “북한이 신고할 핵프로그램 중에서도 핵심은 무기급 플루토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이 신고하는 모든 핵프로그램은 9.19합의에 따라 폐기를 전제로 한 것”이라며 “모든 북한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를 이룩한다는 미국의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도 했다.

그는 지난 16일 호주의 싱크탱크인 시드니연구소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한이 소유한 플루토늄 50㎏ 문제가 향후 6자회담 진전의 핵심이 될 것”이라며 “북한이 이 플루토늄 폐기를 최종 결정하기 전까진 미국은 대북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의 핵폐기 의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을 ‘플루토늄 50kg’을 상정해 놓고 있어 북한이 얼마나 미국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플루토늄 보유 사실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추출된 플루토늄의 양 뿐만 아니라 플루토늄을 어떤 형태로 보관하고 있고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핵무기 제조에 얼마만큼의 플루토늄이 사용되었는지를 밝힐 경우 북한의 핵무기 제조 능력을 파악하는데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처음부터 북한이 플루토늄 추출량을 정확하게 신고할 가능성이 적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미국도 이런 염려 때문에 ‘플루토늄 50kg’이라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며 이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맞추지 못할 경우 북한이 바라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없다는 경고도 계속 보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올 연말까지 이런 일련의 협상 과정들이 순항할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물론 북한도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강하게 바라고 있지만 어렵게 추출한 플루토늄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사태와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문제에 발목이 잡히면서 북핵문제 해결을 ‘정치적 유산'(legacy)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때문에 ‘비핵화 2단계 로드맵’에 따라 북핵 불능화와 신고를 연내에 해결하겠다는 목표에 매달리고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시 행정부는 조급해지기 마련이고 결국 북핵 협상의 주도권은 북한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이 미국이 제시한 시간표에 맞춰 이행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편, 힐 차관보는 제2차 북핵 위기의 원인이 됐던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도 연내에 상호 만족스러운 수준에서 해결하기로 북측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HEU 프로그램이 더 이상 미국에 대한 위협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의 투명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힐 차관보는 29일 다시 베이징을 방문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일정과 누굴 만날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비핵화 2단계 로드맵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는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