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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라” “먼저 버려라” “주면 버리겠다” “버리면 주겠다”
북핵문제 6자회담의 향후 협상전망은 이렇게 정리된다. 북한은 경수로를 먼저 달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핵폐기가 우선이라 주장한다. 미국의 입장에 일본은 적극 지지, 한국과 러시아는 일반적 지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중국은 아직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제4차 6자회담의 결과로 9월 19일 채택된 베이징 합의는 지극히 원론적인 ‘각자의 의무’를 담고 있지만 선후(先後)의 문제가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이것을 “언어의 지뢰밭”(미 국무부 前 한국어 통역관 김동현)이라 하고, 다른 이는 “창조적 모호성”(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 송민순 차관보)이라는 그럴 듯한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논란의 핵심은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 내에 NPT와 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한다”는 조항과 ▲“다른 참가국들은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는 조항. 이 둘 중 도대체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이다. 향후 회담은 그 선후를 가리는 지루한 말싸움의 과정이 될 것이다.
북 “先 경수로” ← 한, 러 → 미, 일 “先 핵폐기”
논란은 합의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19일 합의문이 발표된 직후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미국은 국무부 부대변인을 통해 분명히 대조되는 각자의 입장을 발표했다.
먼저 북한.
“이번 공동성명에서 천명한 대로 우리들은 경수로를 제공하는 즉시 NPT에 복귀하고 IAEA와 담보협정을 체결하고 이행할 것이다.”
합의문에는 선후관계가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도 북한은 ‘공동성명에서 천명한대로’ 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경수로 먼저’를 주장했다. “경수로 제공 없이는 우리가 이미 보유한 핵 억제력을 포기하는 문제에 대해 꿈도 꾸지 말라”고 강경하게 나섰다.
다음 미국.
“북한이 NPT 조약에 복귀하고 IAEA의 사찰을 받을 때가 경수로 문제를 논의할 적당한 시점이다.”
요는, 6자회담의 참가국들은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는데, 그 적당한 시점이 대체 언제냐는 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은 현재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문제”라며 경수로 제공의 ‘적당한 시점’을 미래로 못박았고, 북한은 ‘적당한 시점’을 ‘바로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
이태식 외교부 제1차관은 “문건(합의문)을 보면 NPT 복귀는 ‘조속히’로, 경수로 제공은 ‘적절한 시점’으로 돼 있다”는 표현까지 거론하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IAEA의 핵사찰을 받고 NPA에 재복귀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평화적 핵이용권이 생기게 되고 경수로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일단 선(先) 핵포기, 후(後) 경수로의 원칙에 서있다고 할 수 있지만 미국과는 약간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송민순 차관보는 북한의 선 경수로 제공 주장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발언”이라고 해석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북핵 폐기와 경수로 제공시점을 둘러싼 미북간의 의견차에 대해 “서로의 최대치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정부는 미북 간의 이러한 갈등에도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다.
일본의 마치무라 외상은 북한의 선 경수로 제공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호소다 관방장관도 “북한이 모든 핵계획을 포기하고 NPT에 복귀한다는 약속이 먼저 필요한 순서”라고 미국의 입장을 거들었다. 마치무라 외상은 “진짜 어려운 건 다음 번 6자회담”이라고 내다봤다.
러시아는 핵폐기와 경수로 제공의 선후관계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북한이 NPT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러시아는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할 수 없다”(6자회담 러시아측 수석대표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차관)고 말함으로써 미국의 입장에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군사적 수단’으로서의 북핵이 ‘솔직한 북핵’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 게임의 해법은 사실 의외로 간단하다.
북한의 핵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양면성을 지닌다. 하나는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이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를 만들어 미국의 압력에 맞서보고자 하는 군사적 수단이다. 북한은 초기 핵개발은 전자의 입장에서 출발했는데, 어쩔 수 없이 후자로 전환되었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이 양면성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된다.
북한이 경수로를 달라고 하는 것은 주로 전자의 입장에 서있고, 미-북간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자고 하는 것은 후자의 입장에 서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북한에 경수로의 전력량에 해당하는 만큼의 대북송전을 해준다고 함으로써 경제적 수단으로서 북핵의 의미는 상당부분 상쇄되었다.
북한은 “지금 당장 경수로”를 외치지만,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북한 스스로도 잘 안다. 6~10년은 걸린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조건 없이 전력을 주겠다는 것이고, 게다가 지난 제4차 6자회담에서는 중유공급까지 합의되었다. 핵만 내놓으면 북한은 당장 두 배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군사적 수단으로서의 핵’밖에 없다. 사실은 이것이 북한의 ‘솔직한 핵’이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공격 의도가 아직도 농후하기 때문에 핵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미국은 제4차 6자회담 합의문에 “미국은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합의해 준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사실 미국이 잠재적 혹은 현실적 적대국가와 ‘핵무기뿐 아니라 재래식 무기로도’ 공격의사가 없다고 합의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북한은 여기에 실효성이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나머지 4개국이 지켜보는 것만큼 확실한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작금의 상황은 이렇게 비유해 볼 수 있다. 날카로운 칼을 지닌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것을 조리용이자 자위용이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조리용이라면, 사람을 찌르는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는 특수 제작된 칼을 제공해주면 문제가 해결될 텐데, 그런 칼을 만들어주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는 “그럼 그때까지 우린 굶어 죽으란 말이냐”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이웃에 있는 친구가 “대용의 칼이 올 때까지 내가 너에게 음식을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것이 못 미더우면 주위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식권까지 주겠다고 했다. 이로써 사실 그가 조리용으로 칼을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없어졌다.
머쓱해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기가 경수로 대용이라면 흥미 없다.”(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
사실 북한에게 남한의 전력지원 제안은 삼키기도 내뱉기도 애매한 뜨거운 감자다. 이쯤 되면 향후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이 가능하다.
협상이 진행되면 될수록 경수로 없이는 핵폐기 못한다는 북한의 주장은 ‘말발’이 먹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미국의 대북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여기에 모든 선전매체와 친북세력을 총동원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위용 핵보유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자위적 수단으로 핵을 보유한다는 주장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렵다. 6자회담 참가국, 특히 우방인 중국마저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애초에 북한의 핵은 ‘핵을 통해 정권을 지킬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출발했던 바, 그 어리석은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정권과 함께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오는 9일에 개최되는 제5차 6자회담은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이자 북한의 논리가 갈수록 궁색해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누가 먼저 행동하느냐’가 향후 10년 좌우
여기서 혹자는 이러한 제안을 할 수도 있다. 그냥 북한의 요구를 모두 들어줘 버리자고 말이다. 예컨대 경수로를 요구하고 있으니 신포 경수로 건설을 즉각 재개하고, 불가침협정을 요구하고 있으니 어차피 침공의사가 없다면 도장을 찍어주는 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이 1990년대 1차 핵위기를 미봉책으로 귀결지었다. 당시 제네바 합의의 작성자들은 “합의의 귀결 시한이 다가오기 전에 북한 정권은 무너져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차후에 드러났다. 북한정권은 지난 10년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갈취와 폭압으로 정권을 유지해온 불가사의함도 겸비하고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이제부터 북핵협상은 본격적인 ‘행동 대 행동’의 차례에 들어설 것이다. “까짓 것 통 크게 약간 먼저 행동해준다고 큰 일이야 있겠느냐”고 섣불리 행동하게 되면 북한에게 끝없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다. 예컨대 구체적 북핵 검증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경수로 제공협상 시작이나 불가침협정 체결 논의 등이 그렇다.
0.1초 앞선 행동을 누가 먼저 취할 것이냐에 따라 향후 10년이 좌우될 수도 있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