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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현안의 남북관계 및 대북정책의 핵심 이슈는 역시 ‘북한 핵문제’이다.
이번 ‘10.4남북선언’을 두고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가 대립되고 있지만, 논쟁의 본류는 단연 남북관계에서 북핵문제를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에 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북핵병행론’과 ‘북핵선결론’의 양립구도라고 할 수 있겠다.
큰 틀에서 볼 때, ‘병행론’은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제반 현안 문제들과 북핵문제를 분리해서 병행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선결론’은 북핵문제 해결 없이는 남북관계의 어떠한 진전도 가져오기 어렵다는 입장으로, 先비핵화 後남북관계 개선을 주장한다. 병행론이 10.4남북선언을 추진한 노무현 정부 및 범여권 진영의 논리라면, 선결론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을 비롯한 범보수 진영의 논리를 집약하고 있다.
병행론과 선결론의 대립은 이번 정상회담을 전후로 선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립점을 몇 가지로 세분화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정상회담의 개최 시기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회담의제와 관련된 대립이며, 셋째는 10.4 남북선언에 대한 평가에서 가시화되었다.
우선, 정상회담 개최 시기와 관련한 논란에서 병행론과 선결론의 입장 차이는 비교적 간단하다. 병행론은 북핵문제의 진척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 어디서라도 남북한 정상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공식, 비공식 라인을 동원해 북측에 끊임없이 정상회담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해 10월 핵실험 이후 북한의 핵무장이 현실화된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행론적 시각에서 정상회담 개최 시기는 북한의 선택에 달려있을 뿐, 북핵문제와 연계해 고려된 것이 아니다.
반면 선결론은 정상회담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정상회담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북핵불능화 조치를 거쳐 완전폐기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수많은 난제가 있는 만큼 섣부른 남북정상회담은 오히려 북핵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논리가 곁들여졌다.
다음으로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한 병행론과 선결론의 핵심쟁점은 비핵화 문제를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다룰 것인가와 비핵화 없는 평화선언 또는 평화체제 논의의 실효성 여부에 있었다. 여기에서 병행론자들은 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다루어질 문제이지,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전제를 두었다. 따라서 주요의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정상회담과 6자회담이, 경제협력과 평화가,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가 각기 선순환 구조를 형성해 시너지를 더할 것이라는 논리로 정상회담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에 반해 선결론적 시각은 대북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모든 문제를 先비핵화에 종속시키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비핵화가 의제로 포함되지 않는 정상회담은 무용하다는 의견을 펴다보니, 이번 정상회담 자체가 12월 대선을 겨냥한 국내정치용 이벤트라는 주장이 부각되었다. 논리의 요지는 한반도의 평화 또는 평화체제는 북한의 핵포기가 완료될 때 가능하다는 것인데,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평화를 논할 수 없다는 현실주의적 시각이 짙게 배어 있다. 남북경협의 확대 또는 남북경제공동체 건설도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의지 없이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비핵개방 3000’과 ‘신한반도 구상’도 이러한 논리와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내 정치세력간 대립구도 반영
결국 병행론과 선결론의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10.4남북선언’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병행론적 입장을 가진 측에서는 이번 회담이 하늘길과 땅길, 바닷길을 열고 평화와 공동번영이 선순환하는 전략적 접근을 이루어 냈으며, 남북 간에도 ‘비적대적 협력관계’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실로 감개무량한 역사적인 회담으로 남북협력이 점에서 성과면으로 확대되어, 명실상부 낮은 단계 국가연합단계로의 진입이 사실상 가능하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이들 중 일부는 10월 04일 선언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번 남북선언을 ‘1004(천사)선언’으로 칭한다.
이에 북핵선결론을 주장한 측의 평가는 다소 복잡하고 정치적이다. 10.4남북선언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남북협력방안을 포함하고 있어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전제하면서도, 북핵폐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이행 가능성이 낮다거나 북한이 합의 위반시 제재 방도가 없다는 등의 평가가 곁들여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번 정상회담과 10.4남북선언은 ‘반보수대연합’ 구축을 위한 대선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러다보니 이들의 주요한 관심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12월 대선정국에 어떤 파장을 미칠 것인지, 대선에서 핵심쟁점이 될 것인지에 모아져 있다.
이상의 내용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병행론과 선결론 모두 국가전략적 차원의 접근이라기 보다는 국내정치세력간 대립구도를 반영한 정략적인 접근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병행론은 북한 핵문제를 군사 안보적 측면에서 냉정한 이성으로 전략적인 접근을 하기 보다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현란한 언술과 검증 및 실행이 담보되지 못한 합의문서에 지나치게 의미부여하고 있다. 그 성과에 대해 홍보하기에 바쁘다. 비록 그 합의 성과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래선 안 된다.
병행론자들은 정상회담 결과인 남북간 합의를 국내외적 조건에서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이를 위해 정치통합력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합의 사항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어떤 수단으로 이행을 강제할 것인지 숙고할 시기이다. 또한 NLL 등 군사 안보적 우려와 제기된 문제를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합의사항의 이행을 위해서는 남은 임기동안 현 정부가 할 일과 내년에 새로 들어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차분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간 남북간 있었던 역사적인 합의문들이 왜 사문화되었는지, 다시금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핵문제와 북한 민주화 연계하는 전략 필요
선결론자들도 이번 정상회담의 결과를 대선용으로 한정하여 접근해서는 안 된다. 민족공조와 국제공조의 대립각이나 친북좌파 등 이념공세에서 이제는 무게중심을 국가경영의 관점에서 남북관계의 재정립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모든 문제를 북핵에 종속시키는 선결론의 틀을 벗어나, 남북관계와 핵문제를 연계하는 연계론적 시각에서 단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비핵 개방을 전제로 한 남북한 경제공동체건설은 현재까지 선언적 수준의 슬로건이다. 문제는 어떻게, 어떤 수단을 동원해 북한을 비핵과 개방으로 유도 또는 강제할 것인가에 있다. 병행론자들이 제기한 선순환 논리에 대응하는 대북접근론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핵문제가 완전 종결될 때까지 남북간 제기되는 모든 현안을 뒤로 미뤄둘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북핵선결론적 주장은 국내 우파진영의 정서를 감안한 정치적 측면과 대북 압박 측면에서 일정 유효한 점이 없지 않겠지만, 집권 이후 대북정책 기조로서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지나치게 경직될 수 있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세계적 탈냉전과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우리 정부의 대북 및 통일정책은 민족성 우위의 시각과 국가성 우위의 시각의 경쟁과 갈등이라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남북관계에서 민족성과 국가성을 넘어 세계주의를 수용하는 문명사적 시각이 보태져야할 시점이다.
북핵병행론이 민족성 우위에 시각에 치중해서 발로한 것이라면, 북핵선결론은 국가성 우위의 시각에 더 기울어 있다. 문명사적 접근은 남북관계의 민족성과 국가성의 조화를 꾀하면서도, 핵문제와 북한체제의 자유와 민주화, 인권 등 문명사적 문제를 연계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북핵연계론적 접근은 남북관계에서 나설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대단히 치밀하고 전략적인 공정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