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고서 제출과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등의 절차 착수로 6자 수석대표 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섰다. 북핵 ‘10∙3합의’ 이후 9개월 만에 열리는 이번 회담에선 신고서 검증 및 3단계 폐기 로드맵이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신고서 제출로 ‘오픈 게임’을 마무리 짓고 ‘본 게임’에 돌입한 만큼 6자 관련국들은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핵 폐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비들이 많다. 신고서에 대한 정확성 여부, 플루토늄 프로그램 검증, 보유 핵무기 처리,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및 시리아 핵 협력설, 미북관계 정상화 과정 등 하나 하나의 쟁점마다 해법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때문에 북한의 핵 신고와 냉각탑 폭파,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및 적성국교역법 적용에서 북한을 해제하는 조치들이 취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당사국들은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신고서 ‘검증’과정에서 북한의 성실한 태도 여부를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반응이다.
◆ 核신고서 정확성 여부 ‘검증’ 주목 = 북한이 중국에 제출한 핵 신고서에는 플루토늄 추출량과 사용처, 핵 관련 시설 목록, 핵연료 재고량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중 플루토늄 추출량에 대해 북한은 40kg안팎을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미국 정부 및 전문가들의 산출량(50~60kg)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수치다. 1기의 핵무기 생산에 필요한 플루토늄 양이 4~8kg이 소요되는 것을 비춰볼 때 추출량의 차이는 곧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의 양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 신고에 대한 ‘검증’문제가 향후 북핵 3단계 로드맵 마련에 최대 난제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한∙미 등은 플루토늄의 철저한 검증을 위해 현장 접근과 샘플 채취, 북한 과학자와의 면담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으로서는 군사시설 등의 공개가 불가피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해 1만8천여 페이지의 핵시설 가동기록을 미국에 넘겨주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검증은 문서제출이 아닌 실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 때문에 북한의 태도변화가 주목된다.
따라서 개최될 6자회담에선 검증 방법에 대해 북한과 나머지 참가국들 사이에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이럴 경우 해법 찾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이 핵시설에 대해 미국이 요구하는 수준의 철저한 검증에 협조해줄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뿐만 아니라 핵실험 기지 등 다른 의혹시설에 대한 강도 높은 검증절차를 원할 것이지만 북한은 이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 3단계 ‘폐기’에 대한 입장차 =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관련국들은 3단계가 종결되는 최종 단계이므로 핵무기도 3단계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무기를 3단계에서 다루지 않고 나중에 다루자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를 비롯해 모든 핵물질의 폐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전례를 볼 때 핵을 장사수단으로 인식하는 북한은 최대한 잘게 나눠서 협상하는 ‘살라미 전술’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정일 정권은 핵무기를 체제유지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은 당초부터 핵무기는 6자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왔고 이 문제도 이번 신고에 빠져 있다.
북한은 미북관계 개선과 핵보유국 인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군 철수, 경수로 제공 등의 조치들을 모두 들어주는 순간까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UEP 및 북핵 확산설 검증 =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28일 “(북한의 핵신고서엔) 고농축우라늄(HEU)과 핵 확산활동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지만 우리가 필요한 충분한 답은 담겨 있지 않다”며 UEP 문제 등을 짚고 넘어갈 뜻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 부시 행정부가 플루토늄 추출량에 대해 집중하면서 UEP 및 핵 확산 의혹 등을 대충 넘어가려 한다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불만이 제기된 만큼 이 문제에 대한 진전이 필요하다.
미국은 의회 내 반발을 무마하고 북핵문제의 진전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우라늄농축 문제와 핵확산 활동을 어떻게 모니터할 것인가에 대해 북한의 협조를 최대한 얻어내려 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한은 지금의 제2차 북핵위기 발단의 원인인 UEP에 대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해왔고 시리아에 대한 핵기술 제공도 강력히 부인해왔다.
또 UEP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 등은 은폐가 쉬워 사실상 북한 전역을 땅속까지 모두 뒤지지 않는 한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검증이 북한의 협조 아래 원활히 이뤄진다 해도 최소 수 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 北, 핵페기 대가 ‘경수로’ 요구할 듯 = 북한은 3단계의 일정 시점에서 경수로 건설을 요구하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신뢰가 충분히 쌓이기 전에 북한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미∙북협상은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후에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은 그전에 경수로 제공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 등은 경수로 대신 북한의 에너지난을 해결할 대안으로 화력발전소나 기존의 발전시설의 효율을 높이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북한은 제네바합의로 신포에 건설이 중단된 경수로 부지를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경수로 제공을 원하고 있다.
◆ 미북관계 정상화되나? = 미북관계 정상화는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이 폐기된 뒤에나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입장이다. 미북관계가 정상화되려면 남아있는 모든 제재가 해제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이 해제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한고, 미사일 수출, 위폐∙가짜담배∙마약 생산 및 유통 등의 불법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
따라서 6자회담이 개최되더라도 산적한 문제들 중 하나라도 걸림돌로 부상할 경우 북핵문제는 또다시 장기 교착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내에선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북핵폐기 완료 가능성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높게 보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앞으로 남은 6∼7개월간 북한이 얼마만큼 ‘검증’과 폐기 협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느냐다. 이에 따라 향후 북핵정국이 좌우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