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북한은 외부 관중에게 혼란함을 가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피력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인민생활향상”이라는 구호로 선경후군(先經後軍)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체제 이슈를 띄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대내외적 행보는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고 ‘변화’하지 않겠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지도부는 최고지도자 신변의 불확실성으로 2012년 “강성대국” 진입과 동시에 후계체제의 ‘공식화’라는 정치적 과제 해결이 매우 절박한 실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7차 당대회 개최를 통한 밑으로부터의 공식적 추대 절차가 반드시 필요한데, 여기에는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기본적 조건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이를 위한 방식으로 계획경제체계를 원상 복구시키려는 보수적 정책기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중국·베트남 등 여타 이행경제체제의 사례를 불러오지 않더라도 북한 자체의 경험이 말해 주듯, 사적 생산의 점진적 허용 없이 증산의 효과 및 공급의 확대를 장기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먹고 입는 문제’와 같은 기본적 인민생활 개선을 위한 자원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것인가? 올해 북한 신년공동사설은 외부의 지원을 수취하는 방식으로 내부문제를 해결하겠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이 핵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북한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핵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북한 최고지도부에 핵보유국 지위 확보는 남한의 군사비가 북한 전체 GDP의 2.4배가 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불리한 남북 군사균형을 일거에 역전시켜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방지하는 수단”이며, 이와 더불어 대내 정치적으로 “최소 지배집단의 최대 응집력”을 유지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더욱이 ‘비핵화’ 협상과정에서 외부 지원을 획득해 계획경제의 정상화와 이를 통한 후계구도 ‘공고화’를 위해서라도 완전한 핵 포기를 선택하기 곤란한 상황에 있다.
다시 말해 ‘지배권력-경제자원-핵무기’가 분절되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계체계 공고화, 계획경제체계 복원, 핵보유국 지위 확보라는 세 차원의 목표치들이 하나의 세트로 응결된 것이 현 북한정권의 구조적 모습이다.
따라서 북한이 표방하고자 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이상적 모습은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후계체계를 ‘공식화’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의 최대 딜레마는 핵을 포기할 경우 흡수통일의 가능성이 상존함으로써 지배집단의 응집력이 와해되 정권의 체제유지가 어렵다는 것이며, 핵무기를 계속 보유할 경우 외부의 경제적 지원 유도가 어려워 후계체계의 ‘공식화’가 계속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하려 할 것인가? 향후 북한은 핵 프로그램 완비를 당분간 최대한 비공개적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외부 관중의 관심을 북핵 폐기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전술을 구사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작년 8월 이후 계속된 유화공세를 지속할 것이며, ‘협상’ 틀의 변화 및 의제의 다양화 등을 시도하여 비핵화 협상의 장기 공전을 유도하면서 국제제재 국면을 완화해 외부 지원을 수취하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시 괜찮은 이슈가 논의구조가 복잡하고 관련국간 이해관계가 얽힌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일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에 핵을 개발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평화체제’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남·북·미·중 4자 간에 1997년 8월부터 1999년 8월까지 3번의 예비회담과 6번의 본회담 과정을 거쳐 논의된 바 있으나 흐지부지된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작금의 북한의 대내외적 행보는 개혁·개방 및 북핵폐기라는 ‘본질’의 문제에서 외부 관중의 관심을 분산(distraction)시켜 후계구도 구체화에 필요한 시급한 외부 물자공급을 수취하려는 의도의 표현이다.
그런데 북한이 향후 1~2년 내 긴급 외부지원 수혈을 위해 어떤 대상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현재 북한은 중국에 가장 많은 기대를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한국과 미국이 지난 시기와 달리 긴밀한 공조를 유지하면서, “핵협상은 미국역할을, 경제협력은 남한역할을 부각시키는 북한의 선택적 이중성”에 말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가 상당한 “전략적 인내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향후 1~2년 기간 북한은 전방위적 관계개선의 외양을 보일 것이지만, 실제로 중국으로 경사될 수밖에 없는 상황적 조건에 처해 있다.
올해 신년공동사설에 “인민생활 향상”, 남북관계 개선 의지에 대한 직설적 표현,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체제 마련과 비핵화 등등의 용어선택에는 중국 요인(factor)에 대한 고려가 가장 많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이 지속적으로 북한에 요구했거나 중국이 선호하는 한반도 문제해결 방식이기도 하다.
중국은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기본적으로 ‘전략적 관리론’의 시각에서 북핵 상황을 조망해 왔다. 즉 북핵 상황의 장기공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문제의 궁극적 해결(resolution)보다는 상황의 ‘관리’(management)에 주력했다.
중국은 상황변화의 ‘주도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북한을 일단 대화의 트랙으로 불러내어 상황을 안정화시키고, ‘경제적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의 확대를 통해 북한의 정권안정 및 점진적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보다 장기적 전략적 이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는 2기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 북핵문제에 대한 ‘이익상관자’로서의 적극적 역할 수행이 오히려 대북 입지만 약화시키고, 북·미 양자구도에 의해 자국이 투입한 외교적 역할이 일거에 소진된 결과에 대한 전략적 반성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관리론’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으로서는 ‘6자회담’ 틀이 유지되게 하는 것 자체가 가장 관건적 외교적 과제일 수밖에 없었으며, 북한은 이러한 중국의 입장을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6자회담을 북한뿐만 아니라 한·미·일의 행위도 통제·관리할 수 있는 기제로 인식하고 있다. 북한은 작년 10월 원자바오 총리 방북 시 ‘6자회담 복귀 및 한·미·일과의 관계 개선’과 ‘북·중 간 대규모 경제협력’을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김정일은 대외전략목표 상 무조건 6자회담에 복귀할 수는 없었으므로 “북·미 양자회담을 통하여 북·미 적대관계는 반드시 평화적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은 “과거 ‘4자회담’이든 ‘6자회담’이든 미·북 양자 대화는 그 틀 내에서 이루어졌고, 양자 대화가 ‘6자회담’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므로(2009.10.6 친강(秦剛) 외교부 대변인 평양 브리핑), 북한으로서는 6자회담을 살리면서도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과제를 중국에 넘겨 운신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주 북한은 최진수 주중 북한 대사를 통해 한반도 평화체제 당사자 문제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듯한 기존의 모호한 입장에서 탈피해 중국을 명시적으로 끼워 넣었다.
이미 북한은 중국의 ‘동북진흥계획’에 의존해 원활한 물자 수혈을 시도하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으며, 중국도 대북 경협과 동북지역 개발을 연계시키고자 하는 정황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훈춘(琿春)·나진 지구 국제물류기지 개발 계획’과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지린(吉林)-두만강(연변·훈춘) 선도구 개발 계획’을 연계시키고 있고, 북한도 나선시를 특별시로 지정하는 등 적극 호응하고 있다.
‘창-지-투’ 계획은 중국 국무원이 작년 8월 30일 이미 비준했으나, 원자바오 총리 방북 뒤인 10월 17일에야 공식 발표했다. 원 총리 방북은 중국의 대북 ‘전략적 관리론’의 구체화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올해 북한은 일종의 ‘개방 조치’ 등의 제스처를 보이면서, 김정일의 중국방문 등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중국의 역할을 부각시켜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변화(개혁·개방, 핵 포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며, 긴급 외부 지원을 수취해 정권안정을 도모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따라서 2010년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는 “전통 우의”라는 기치 아래 뜨거운 외양이 어느 해보다 자주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만, 내면의 긴장감 또한 그에 못지않게 팽팽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이 경제적 관여정책으로 북한을 자신의 영향권 내에서 관리하는 것이 전략적 이해에 부합될 수도 있겠지만, ‘북한 비핵화’의 진전없는 무조건적 지원으로 발생할 수 있는 ‘오디언스 비용’(audience cost)을 마냥 감내하기도 곤란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