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국가위해죄 체포해 ‘사형’협박· 가혹행위”

북한민주화 운동가 김영환 씨 등 한국인 4명이 강제구금된 지 두 달째.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된 이들은 현재 중국 단둥(丹東) 국가안전청(국안)서 감금된 채 영사 및 변호인 접견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김 씨에 대한 영사 접견이 한차례 이뤄지긴 했지만 현재 이들이 어떠한 환경서 어떤 조사를 받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데일리NK는 지난 2001년 내몽고 부근에서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돕다가 체포돼 김 씨와 마찬가지로 국가안전위해죄로 약 8개월간 수감됐다 추방된 (사)두리하나 천기원 목사를 만나 조사과정과 구금생활 등을 들어봤다. 


구금된 시기와 장소가 달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국가안전위해죄가 적용된 같은 사례로서 김 씨와 마찬가지로 조사과정서 한차례의 영사접견만 이뤄지고 이외 변호인 등의 접견이 거부됐다는 점에서 천 목사의 증언을 통해 김 위원 등의 감금 상황을 추론해볼 수 있다.


특히 중국 국안의 조사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조사 관행이나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란 관측을 관계자들은 내놓고 있다.


천 목사에 따르면 일단 국가안전위해죄가 적용되면, 해당 인민검찰원에 사건이 넘겨지기 전까지 국가안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주도로 해당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조사가 이어진다. 이후 검찰로 이송되면 기소 전까지 검찰서 추가 조사를 진행한다. 


비밀리에 조사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신변확인 등을 요청하지 않을 경우, 영사접견을 비롯해 변호인, 가족 면회 등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가 입증되지 않으면 선처를 해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고 이 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조사 기간 연장, 중형 구형 등의 위협이 가해지기도 한다.  


천 목사는 “국가안전위해죄는 초법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조사기간은 중국 당국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천 목사는 지난 2001년 당시 탈북자를 돕다 체포된 후 8개월 만에 국가안전위해죄에서 ‘타인 밀출입국 방조죄’로 적용 혐의가 변경돼 700만원의 벌금을 내고 추방당했다.


[다음은 천기원 목사와의 일문일답]


-조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체포되고 하루 만에 변방부대 감옥으로 이송됐다. 춘절(중국 설) 기간이어서 약 5일 후에 첫 조사를 받았다. 당시 공안(경찰), 군, 국가안전부에서 각각 파견된 3명이 함께 조사했다. 처음에는 가족관계, 직업 등을 물어본 후 중국 내에서의 탈북자 구출활동과 반(反)국가 활동 여부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증거가 충분치 않으면 ‘진실을 말하면 선처하겠다’는 식의 회유와 협박도 했다. 처음엔 수시로 조사를 하더니 이후 주 1회 조사했다.


한 달여 만에 하이라얼(海拉爾)에 있는 감옥으로 옮겨졌다. 옮긴 지 한 달이 지나자 검사 3명이 나와 조사를 시작했다. 주 1회 조사했다. 활동 자금의 출처와 책임자를 계속 추궁했다. 약 7개월 동안 조사가 진행됐다. 기소 직전에 가서야 함께 잡힌 사람들의 진술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이 있었다. 중국어로 돼 있었기 때문에 기소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영사접견은 한차례 한 것으로 안다.


=수감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간수가 찾아와 면회를 간다고 하더라. 소장 방에 불려나가니 영사가 와 있었다. 10분 정도 대화를 나눴고, 영사에게 전화해 달라고 요청해 당시 상황을 가족에게 알릴 수 있었다. 당시 영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밖에 없었다.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다.


-조사과정에서 인권유린은 없었나?


=폭행 등은 전혀 없었다. 단지 ‘똑바로 불지 않으면 사형시킨다’ ‘5년이고 10년이고 조사만 할 수 있으니 협조를 잘하라’ ‘법이 통하지 않는다’ ‘고생을 덜했나 보다’ ‘급할 것 없다’ 등의 협박성 발언이 매번 이어졌다.


‘왜 변호사 접견이 안 되나’ ‘면회를 왜 안 시켜주나’ 등의 항의를 하면 ‘여긴 중국이다’는 말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요구사항에 답변을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수감된 다른 죄수들에게 쇠고랑을 채워놓고, 몽둥이 등을 보이는 곳에 가져다 놓는다. ‘너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직접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수감기간 참기 어려웠던 것은?


=제일 참기 힘든 것은 씻지 못하는 것이다. 목욕을 두 달 만에 하게 됐다. 매일 씻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세숫대야에 물을 줬을 뿐이다. 이것도 독방에 있는 경우에나 씻을 수 있지 일반 수감자들과 함께 있으면 씻기가 거북하다. 그래서 평시엔 만두와 함께 들어오는 물을 조금씩 남긴 후 방장부터 차례로 씻는데 나중에 구정물이 된다.


-식사는 어땠나?


=변방부대 감옥에 있을 때는 하루 두 차례(오전 8시, 오후 5시) 만두(속없는 밀가루 빵)와 물 한 컵이 나왔다. 이후 구역소로 옮긴 후 양배추 소금 절임이 추가됐다. 옮긴지 한 달 만에 쌀밥과 계란볶음이 일주일간 들어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수감됐던 사람들이 석방된 후 사식을 넣어준 것이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하루 세끼가 나왔다.
 
-평상시 생활은 어땠나?


=1/3은 시멘트 바닥, 2/3은 가로 2m 세로 3m 정도 크기의 마룻바닥 감방에 7,8명이 함께 생활했다. 정오부터 1시까지를 제외하고는 기상에서 취침까지 하루 종일 무릎을 꿇은 채 생활해야 된다. 방마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수시로 순찰을 돌아 자세가 흩뜨려져 있는 것이 적발될 경우에는 식사시간을 늦추는 등 불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방장(수감자) 등이 규율을 엄하게 세운다.


다른 수감자들과 생활하기가 어려워 독방을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구역소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독방으로 옮겼다. 하지만 편하게 있지 못한다. 다른 방에 책임을 같이 묻기 때문이다. 종일 그렇게 있으면 나중엔 무릎이 잘 펴지지 않을 정도다. 운동시간도 없고, 책도 반입 않된다.


-아플 때는 어떻게 하나?


=구금되고 나서 건강상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고혈압이 있는데 약을 달라고 호소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계속 항의하면 ‘여긴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고만 했다다. 세면도구도 전혀 없었다. 결국 버티다가 쓰러졌는데 일어나보니 근처 병원이었다. 하루 만에 다시 감방으로 옮겨졌다.


-변호인 접견이나 가족과 면회는 있었나?


=변호인 접견을 요구하면 ‘여기는 중국이야’는 말만 돌아왔다. (중국이 이번에 제시한 김영환 씨 등의) 접견 포기각서는 없었다. 당시 해당 검사도 ‘국가안전위해죄는 초법적이다. 조사만 5년 넘게 할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미결수에게는 변호인이 없다는 말만 되풀했다. (우리 경우는) 결국 언론에 구금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10일 만에 재판에 넘겨졌는데 기소가 된 이후에야 국선변호사가 선임됐다고 하면서 돈을 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더라. 면회도 수감된 지 7개월 만에 하게 됐는데 아내와 딸이 뇌물을 주고 성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