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차기지도자 시진핑은 누구인가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라 차기지도자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은 자제력과 자기 관리가 뛰어난 대기만성형 정치가이다.


푸젠(福建)성 성장,저장(浙江)성 서기, 그리고 상하이 서기등 동부 연안 지방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아 온 시진핑 부주석이 중앙무대에서 위상이 부각된 것은 지난 2007년 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陳良宇)가 비리사건으로 낙마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저장성 서기로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의 빛에 가려져 있던 시 부주석은 천량위가 낙마하자 일약 상하이 서기로 중용된데 이어 복잡한 권력구조와 정치계산 속에서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를 제치고 사실상 차기 후계자로 낙점됐다.


상하이방의 총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태자당의 후견인인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 부주석은 후진타오 주석의 공청단(共靑團) 세력에 맞서 연합전선을 펴며 차기지도자로 시진핑 부주석을 강력하게 밀었고 후 주석도 이왕 연합세력에 차기지도자 자리를 내줄바에만 칭화(淸華)대 후배인 시진핑을 선택했다는 후문이다.


시진핑 부주석이 대권후계의 대운을 잡은데는 상하이방의 위기감 고조라는 정치적 변수와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을 지낸 시중쉰(習仲勛)을 아버지로 둔 태자당의 출신성분과 칭화대 졸업의 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평생을 닦아 온 탁월한 자제력과 자기 관리의 능력이 받침됐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수년전 인민일보의 인터넷판인 인민왕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새 일을 맡을때면 항상 학생의 자세로 노력하는 사람이고 자제와 자기관리를 덕목으로 삼고 목표를 한번 세우면 평생 밀고 나간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난 1969년 ‘지식총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쫓겨 내려가 노동을 강요당했을 때 무거운 책상자를 갖고다니며 석유등잔불 밑에서 책을 읽었고 한 겨울에 맨발로 얼음구덩이에서 일한 일화가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겸손하고 온화하며 붙임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시진핑 부주석은 또 이 시절 촌민들을 위해 쓰촨(四川)성으로 달려가 메탄가스 기술을 배워와 량자허 촌에 메탄가스를 끌어 들였다는 것이다.


‘권력은 민중이 준 것이다(權爲民所賦)’라는 민본사상을 가진 시 부주석은 차기 후계자로 낙점이 된후 중앙당교 교장을 맡아 당 이론연구와 인재양성에 앞장서면서 권력 기반을 다졌고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때 준비 총책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중앙 지도자 능력을 과시했다.


시 부주석은 남북한문제에 두루 밝다. 시 부주석은 지난 2008년 3월 취임 후 첫번째로 평양을 방문, 북한 지도부와 상견례를 했고 작년 12월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2005년 저장성 당서기 시절 방한한 적이 있는 시 부주석은 당시 한국 방문에 앞서 이례적으로 연합뉴스를 비롯한 일부 한국언론사와 인터뷰를 했고 시 부주석의 방한에는 주한중국대사 및 차관급 인사 6명 등 58명에 달하는 중국의 주요인사들이 수행, 그의 위상을 실감나게 했다.


한국인은 부지런하고 지혜롭고 열정이 많다는 인상을 가졌다는 시 부주석은 방한 기간 이명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김형오 국회의장과 정운찬 국무총리 등 정부와 정계의 최고위 인사들을 모두 만났다.


그는 저장성 당서기 시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지금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潘基文)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SK, LG 등 기업인들을 두루 만나고 저장성과 자매결연 관계인 전라남도도 방문했다.


시 부주석은 중국의 국민가수로 인민해방군 가무단장인 펑리위안(彭麗媛)과 결혼했고 외동딸인 시밍쩌(習明澤.18)가 지난 9월 학기에 하버드대에 입학한 것으로 보도됐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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