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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벽두까지 우리 철학계의 학자들은 자생철학을 위해 나름대로의 많은 고민을 쏟아냈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 이런 논의마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같다. 인문학 전반이 대사회적 역할을 상실하고, 대학 내에서 인문학의 역할과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철학 역시 우리들 대중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기분이 든다.
서양철학이 수용된 지 10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 우리의 현대 철학사를 되돌아볼 때 세계철학계에 우리의 철학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만한 것이 잘 안 보인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 하는 것인가? 아마 철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고민을 대부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 중 일부는 단순히 고민하는 차원을 넘어 이런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뜻있는 학자들도 존재하고 있다.
이번에 출판된 선우현 교수의 『자생적 철학체계로서의 인간중심철학』도 이런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은 북한에서 사상의 주체성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창조적 고민을 해온, 그리고 남한에 내려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 반도에 새로운 우리의 철학을 마련하고자 한 황장엽 사상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동안 황장엽 사상을 그와 직접적 만남 속에서 연구해온 학자로서, 이 분야에 가장 정통한 학자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서구철학에 추수적인 우리 철학계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으며, 자생철학의 마련을 위한 단초를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에서 찾고자 한다.
저자에 의하면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연구는 한국적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고 우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침을 제공해줄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우리 철학계가 독창적인 자생적 철학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피해갈 수 없는 과제이며, 그동안 이론철학, 강단철학에 매몰되어 온 우리 철학계에 ‘실천 연관적 철학하기’를 제공해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연구가 남북의 통일 사상 마련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의미부여 아래서,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을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다루고 있다.
첫째로, 저자는 인간중심철학과 주체사상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인간중심철학과 주체사상은 그 사상의 뿌리가 동일하지만, 후자는 수령론으로 이어져 체제옹호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고 보며, 전자는 남북통일사상의 이념적 지평을 제공해주며, 인간과 자연과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론적․인식론적 틀을 제공하는 보편적 이론으로서 기능한다고 보고 있다.
둘째로, 저자는 인간중심철학의 등장 및 정립 배경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1960년대 소련의 우경 수정주의와 중국의 좌경 모험주의의 대립을 넘어 ‘주체’를 세우고자 하였던 김일성의 뜻과 연관하여 북한 내부에 전개된 사상 논쟁에서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이 왜곡․변질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중심철학이 이데올로기화된 주체사상에 대해서 비판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셋째로, 저자는 인간중심철학의 얼개와 내용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중심철학의 철학관, 세계관, 사회역사관, 인생관, 윤리설, 인간론, 민주주의론, 변증법 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곳에서 저자는 인간의 모든 인식활동은 그 자체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는 데 이바지해야 하며, 나아가 철학 역시 “인간을 위한 사업”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중심철학의 부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철학에 의하면 철학은 단순히 이론적 작업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반드시 실천적 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아가 저자는 인간중심철학이 개인과 국가의 차원을 넘어 인류의 영원한 존속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간중심철학은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처럼 물질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두는 관점을 취하며, 또한 반계급주의적 인본주의를 추구한다.
나아가 인간중심철학은 노동(생산) 범주에 기초한 경제중심주의적 일원론을 비판하고, 경제 일변도의 패러다임을 넘어 경제/정치/문화의 삼원론적 패러다임으로 이행한다. 또한 인간중심철학은 마르크스 철학처럼 기존의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차원을 넘어 자본주의의 긍정적 요소를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한층 더 고양시키고 진전시키는 사회체제를 현실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건설의 철학’에 집중한다.
결국 인간중심철학은 자연개조, 사회개조, 인간개조 사업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조화되는 길을 모색한다. 그래서 인간중심철학은 개인생명과 사회생명이 조화되는, 이른바 개인주의적 인생관과 집단주의적 인생관의 조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부분의 논의에서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이 개인생명보다는 집단생명을, 개인의 권리나 자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경도되어 과거의 집단주의의 폐해가 되살아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서 황장엽의 윤리설 역시 종의 보존본능이라는 사회적 생명에 더 치중하고 있으며, 양심도 이런 종의 보존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더 밀고 나가 인간중심철학에서 주장되고 있는 선의 원리와 정의의 원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즉, 저자는 비록 인간중심철학이 목적론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선의 원리와 의무론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정의의 원리를 조화시키려고 하지만,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유보 내지는 침해할 여지를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에는 이 두 원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자주성, 창조성, 사회적 협조성을 다루고 있는 인간론과 관련해서도 세 번째의 사회적 협조성이 집단의 속성으로 귀속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다. 또한 저자는 황장엽의 민주주의론과 관련해서도 집단주의의 문제점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간중심철학이 지니고 있는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즉, 저자는 한편에서는 인간중심철학이 한반도의 현실에 임하여 우리의 현실을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나아가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생철학의 길을 열어놓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시민사회론에 대한 더 철저한 연구를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진답주의 내지는 전체주의로 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인간중심철학이 인간의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주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좀 더 포괄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면이 지닌 중요성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남한에 내려와 황장엽 선생이 현실과 관련하여 주장한 발언이 좀 더 엄밀한 사태 분석에 입각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는 발언에 대해서 더 철저하게 분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황장엽 철학을 이론 내적인 문제와 이론 외적인 문제로 대별하여 그의 철학이 지니는 의의와 한계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도 인정하듯이 주로 후자의 관점에 더 치중하여 그의 사상의 의의와 한계를 논의하고 있다. 그것은 아직 황장엽의 철학을 이론 내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에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서양 철학 수용 100년사에서 아직 스스로 생각하여 이론을 일구어낸 철학자가 거의 없는 우리의 학계 현실을 감안할 때 자생철학을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남북 분단 시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인 통일과 관련하여 우리의 미래 철학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한국 현실에서 황장엽이라는 학자가 어떤 인물이었던 그의 철학 이론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통해 우리의 담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이 시대 철학하는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강대국 출신 학자들의 이론을 근거로 하지 않거나 그들의 이론을 각주로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쓰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글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주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내부 담론의 활성화는 매우 빈약하였다. 근자에 이르러 이런 작업들이 젊은 학자들을 통해 많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미흡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황장엽의 철학과 관련해서는 관심이 아주 미흡한 상태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는 우리 학자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 책의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그가 남한에 내려와 발언한 부분들은 이곳 지식인들에게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과 동기를 상실하게 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그의 철학을 제대로 연구도 해보지 않고 비난한다는 것은 학자적 양식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철학자들의 글에 대해서 우리가 가졌던 기존 인식을 답습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주체적으로 다루고, 또 그런 글쓰기를 한 글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와 비판을 전개하는 길만이 우리 철학의 자생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의 논쟁사가 없이 어떻게 우리의 철학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에 초석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남북한 현대 철학의 의의와 한계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정리하고 우리의 미래 철학을 구축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