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 평화선언, 멋진 사진촬영만 될 것`

갈루치 전 미 차관보 – 박재규 경남대 총장 – 김영희 대기자

갈루치, 미국 대통령이 어떻게 평양에 쉽게 들어가나

▲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국제대학원장(전 미 국무부 차관보·(左))이 1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07 남북 정상회담 기념 국제학술회의-동북아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 시작에 앞서 박재규 경남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中)),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와 대담하고 있다./중앙일보

미 국무부 차관보로 1994년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를 이끌었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장은 19일 “북핵 위기 해소의 가장 큰 난제는 불능화를 어떻게 검증하는가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완전한 핵 폐기가 이뤄지기 전이라도 북한의 의지가 가시적으로 보이면 미국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갈루치와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 경남대 박재규 총장 간의 3각 대담을 정리했다. 갈루치 원장은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대학원대학교가 주최하는 ‘동북아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새시대’ 회의에 참석하러 방한했다.

김영희=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로버트 갈루치=근본적으로 2005년 9월과 2007년 2.13 합의는 94년 제네바 합의의 유산을 뼈대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미 간의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과 양쪽이 모두 핵 문제의 해결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제네바 합의의 유산입니다. 북핵 문제 해결이 기술적.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할 것이며, 여러 당사국이 관련될 것임을 인정한 것도 공통점입니다. 94년엔 핵 동결을, 이번은 불능화를 목표로 했다는 차이는 있어요. 당시엔 없던 논의 체제인 6자회담이 생겼다는 점도 다르군요.

김=동결과 불능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갈루치=동결은 말 그대로 문에 자물쇠를 채우는 개념이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이 이를 검사해 핵 관련 시설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되는 거였죠. 북한이 다시 핵 개발을 시작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 준다는 개념은 결코 없었습니다. 2003년 북한이 동결을 무효화하고 몇 달 만에 핵 개발에 나섰던 경험을 생각해 볼 때 이번 2.13 합의엔 최소한 1~5년 안에는 북한이 핵 재개발에 나설 수 없도록 분명하게 해 놓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박재규=북한 수뇌부와 얘기해 본 결과 당시 미국이 북한이 요구하는 경수로 요구를 너무 쉽게 들어준 데 대해 불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워싱턴 내부에서 북한 정권의 붕괴를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불신이 더 깊어졌습니다.

김=일부에서는 갈루치 차관보가 당시 북한을 너무 신뢰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합니다.

갈루치=신뢰라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에 굉장한 좌절감을 느낍니다. 애초에 협상의 성격이 대결적인데 왜 조건 없이 서로 신뢰하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합의안은 다단계로, 순차적인 스텝으로 이뤄져 한쪽이 이렇게 하면 다른 쪽이 이렇게 하겠다, 주고받는 식으로 돼 있습니다. 2.13 합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계별로 확인하고 검증하는 식입니다.

박=내년 2월로 예정된 불능화 이후 완전한 핵 폐기 단계에 가면 북한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새로운 조건을 들고 나올 수도 있어요. 경수로를 다시 지원해 달라든지, 94년부터 지금까지 경제 제재로 손해를 본 것에 대한 경제적 보상 같은 것들입니다.

김=북한의 핵 불능화가 어느 정도 완료돼야 미국이 이를 2.13 합의의 이행으로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겠습니까.

갈루치=북한에 핵을 연구한 과학자들이 있는 한 ‘되돌릴 수 없는’ 영구 폐기는 불가능합니다. 미 행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연구용 핵 시설, 재처리 시설과 핵 연료봉 공장을 모두 불능화해야 합니다. 또 그동안 농축한 핵연료 특히 플루토늄은 나라 밖으로 싣고 나가야 합니다. 북한의 핵 시설은 다양하지만 규모가 그리 큰 것은 아닙니다. 또 미국은 과거 북한보다 훨씬 대규모였던 이라크의 원자로와 농축 시설과 재처리 시설을 불능화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검증이 문제입니다. 단기적 검증 단계에서 미 정보기관이 평가한 것보다 훨씬 적은 농축 플루토늄을 신고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신고하지 않은 다른 핵 개발 시설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내 경험으로 봐도 북한이 우라늄 농축용 원심 분리기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고 속일 만한 충분한 유혹 요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94년 제네바 합의는 이를 검증할 수단으로 IAEA 사찰단의 감시를 내세웠습니다. 2.13 합의는 이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실무 그룹이 할 것인지, IAEA가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검증이 가장 중요합니다.

김=북한이 핵 시설 불능화를 한 후 북.미 관계 정상화를 하고 그 다음 완전한 핵 폐기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됩니까.

갈루치=개인적으로 북한의 주요 핵 시설에 대한 불능화가 이뤄지고 북한 핵에 대한 감시 체제가 확립되고, 다른 2.13 합의 조항들도 순조롭게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북.미 관계 정상화를 추진할 만하다고 봅니다. 핵 완전 폐기가 완료되지 않았더라도,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고 북한이 핵물질, 특히 농축 플루토늄을 제대로 신고해 이를 폐기하는 단계에 이르면 관계 정상화에 돌입해도 된다고 봅니다.

김=노무현 대통령의 4자 평화선언 구상에 워싱턴은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갈루치=그건 멋진 사진 촬영 기회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평양에서 만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쉽게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한국 정부는 꼭 4자 정상이 만나지 않더라도 4개국 외교장관이 베이징에 모여 선언만 해도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갈루치=그건 현실성이 없진 않습니다. 베이징에서의 외교장관 회담 정도라면 미국이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하지만 핵 불능화에서 실질적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는 똑같습니다.

◆로버트 갈루치(61)=미 클린턴 행정부 때인 1994년 미국 측 협상 대표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 냈다. 채찍과 당근을 병행한 협상만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대표적인 대북 협상론자다.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뉴욕 주립대를 거쳐 브랜다이스대에서 석.박사 학위(국제정치학)를 받았다. 74년 국무부 군축담당관으로 시작해 차관보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현재 워싱턴DC 소재 조지타운대 에드먼드 월시 외교대학원 원장이다./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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