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성명 1주년> `죄수의 딜레마’

“9.19 공동성명은 ‘죄수의 딜레마’의 산물이다.”

6자회담의 최대성과로 꼽히는 9.19 공동성명이 지난해 제4차 2단계 회담에서 어렵게 채택된 직후 회담에 정통한 한 외교소식통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일정한 조건에서 경쟁자 간의 경쟁상태를 잘 이용해 최적의 전략을 선택하는 게임 이론인 죄수의 딜레마가 가장 극적으로 투영된 외교적 산물이 바로 9.19 공동성명이라는 것이다.

두 명의 죄수는 물론 북한과 미국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압박하는 집행관은 의장국 중국이었다.

6자회담 4차 회담은 1단계와 2단계로 나뉘어 무려 20일간이나 계속됐다. 1단계 회담은 7월 26일부터 8월 7일까지 열렸다. 그리고 다시 9월 13일 2단계 회담이 열렸다.

회담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워낙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었다.

각국 협상 대표들은 물론 운집한 각국의 취재진이 힘들어하고 있는 9월 18일 저녁 전체회의에서 의장국 중국은 결단을 내렸다.

6개 항으로 된 문서를 각국 대표들에 회람시키면서 “더 이상 토론은 없다”며 찬성이냐 반대냐는 의견표시만 하도록 ‘게임의 룰’을 정해버렸다. 그리고 시한도 “내일까지”로 못박았다는 후문이다.

나중에 ‘9.19 공동성명’으로 불리게 된 이 문서에는 북한이 그토록 싫어하는 ‘선(先) 핵페기’가 제1항에 있었다. 북한이 반발하려 하자 중국은 이를 외면했다.

문서에는 또 미국이 수용하지 않겠다고 했던 경수로 건설 문제가 담겨있었다.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문제를 논의하자는 내용에 미국도 움찔했지만 중국은 이도 못 본 척했다.

중국측 수석대표이자 6자회담 의장인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은 “이제 각국은 본국 정부와 연락해 이 문서의 수용 여부를 중국에 통보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를 끝냈다.

중국이 제시한 이른바 ‘5차 수정안’을 쥐어 든 각국 대표들은 문서의 내용을 세심히 살폈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전부를 거부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흔쾌히 받아들이기에도 부담스런 내용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문서는 이른바 `출구전략’에 따라 마련된 것이었다. 복잡하고 민감한 현안들이 많지만 일단 출구는 확인하자는 중국과 한국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출구에 이르는 방향과 방법은 물론 각국의 처지에 따라 달랐다.

피를 말리는 수 싸움이 펼쳐졌지만 각국 대표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지 몰랐다. 특히 북한과 미국의 태도가 관건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경수로가 포함된 문서’에 만족을 표하며 중국 측에 ‘찬성할 수 있다’는 의중을 건넸다.

미국은 초조해졌다. 핵심 고민거리는 역시 경수로였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이뤄진 제네바 핵 합의의 상징물인 경수로가 포함된 문서를 부시 행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게다가 경수로의 핵무기 생산 이용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워싱턴의 네오콘들이 지켜보는 마당에 ‘비둘기파’의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힐 차관보는 18일 밤 워싱턴의 고위층을 다급하게 찾았다. ‘받을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에 대한 지침을 달라는 몸부림이었다.

결국 선택은 조지 부시 대통령이 했다. 북한의 핵폐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문서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9.19 공동성명은 다음날 전 세계에 탄생을 알리게 된 것이다.

협상에 참여한 한 정부 관계자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북한은 미국이 노(No)를 선택하는 순간 갑자기 예스(Yes) 카드를 내밀 태세로 보였다”면서 “판을 깬 당사자로 몰리지 않으려는 압박감이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데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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